고요한 시간

[야고보서 3:13-18] 민주주의는 지구주민의 것이다

사이 (SA-E) 2021. 11. 4. 10:13

전지구적 양극화에 기반한 경제세계화 사회에서 시기심과 경쟁심(3:14, 16)은 단순히 드러나는 개인의 경쟁의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구조적인 악이기도 하며, 다시 말해 지금의 경제구조가 어떻게 유지되는지와 관련된다. 부자 나라 한국은 자기 나라 내에서 가난한 사람 도우면서 그것이 마치 자본주의의 역기능을 극복하는 과정인 것처럼 착각한다. 그렇지 않다. 시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고기 먹여줄 때, 사료 생산을 위해 숲이 밀려나가고, 원주민은 삶터를 빼앗긴 채 노예 노동하며, 그들의 입에 들어가야할 채소까지도 빼앗기고 있다. 문명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 사이에서 그런 구조가 가능한 것은, 그것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경제세계화의 의미는 힘을 가진 이들이 국가의 이름으로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곧 구조악으로서의 시기심과 경쟁심은 단순히 개인의 감정이 아닌, 그런 것들을 추동하는 정치경제 체제다. 부자 나라 한국은 자기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고, 고혈을 짜내는 구조를 통해 얻는 이득으로 안락을 누리면서, 바로 그 악한 구조를 지지하고 있다. 바로 그게 구조적 시기심과 경쟁심의 근원이다.

 

지혜(3:13)는 그런 국가주의=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 현실의 상황 파악을 함에 있어서, 단순히 돈 많은 한국의 자국민 대상으로 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탈국가주의적인 시선으로 다시 보는 것이다. 그 핵심에는 차별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 있다. 국가주의가 기능할 수 있는 근거는 차별주의에 있다. 이때 너무나도 당연시 되는 종차별주의를 가시화하고 그에 저항하는 과정은, 우리 안에 있는 차별주의의 본질을 대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대면할 수 있어야 극복이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지구적 착취 구조가 가능해 지는 것은 종차별주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종차별주의의 극복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또 하나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평화와 친절, 온순함(3:17)은 부자나라 한국의 평화가 흘러가서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착취당하고 있는 곳에서 이뤄지는 평화를 통해서만 지구적 우리의 평화가 가능한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여전히 피를 흘린다. 그런데 우리는 피를 흘리고 있는가? 아니라면 그건 그저 차별(편견)과 위선일 뿐이다. 착취당하는 그곳이 세상의 기준이 되도록 함께 피를 흘리는 연대와 직접행동이 우선이다. 그것 없이는 정의의 열매는 얻을 수 없다(3:18). 어쩌면 그 열매는 민주주의 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민주주의의 ''은 국민이 아니다. 그런 것은 제국주의적 약탈일 뿐이다. 여기서 주인이라고 말하는 민은 바로 모든 지구주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