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에서 나타나는 예수와 비인간 동물의 관계
(*본문에는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동물들에 대한 모든 주석적 해석이 들어 있습니다.)
결론
마가복음에서 예수와 비인간 동물의 관계는 민중들의 생활과 닿아 있다. 마가의 청중은 로마의 박해 상황에 있는 하층민들로 그들이 마주하는 삶의 자리를 반영하기도 한다. 동시에 유대인인 예수가 그의 생활문화사 속에서 마주하는 동물과의 관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신학적 개념에 있어서는 하나님 안에 동등한 가족이더라도, 실제 생활에서는 가축화된 노예 상태를 정상적인 것으로 보며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가복음에서 나타나는 비인간 동물들의 생태는 사실적으로 반영되는데, 이는 지혜문학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외경에서는 말을 하는 등 우화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으나 구약에서는 그런 우화적인 모습은 나타나지 않으며, 이는 마가복음에서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로마에서는 비인간 동물에 대한 우화적인 모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어, 이는 마가의 청중들이 그들을 둘러싼 환경과 구분되는 전통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비인간 동물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지혜는 종종 신학적 이미지를 그려내는 데 사용된다. 마가복음의 예수는 만물의 원인자인 우주적 그리스도로 그려지기 보다는, 하층민 출신의 실패한 영웅이지만 하나님에 의해 왕으로서 인정받는 존재다. 이는 어리석은 제자들과 달리 고난을 견디는 모본을 제공한다. 그러한 주제에 맞춰 청중들이 익숙한 생활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그만큼 비인간 동물에 대한 도구화가 그대로 학습된다. 그 안에서 가축화된 이들은 인간의 사용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처럼 그려진다. 마가복음에서 등장하는 예수 역시 이를 보장하는 역할을 한다. 비인간 동물에 대한 시대적인 위계와 차별은 정상화되고 비가시화 된다. 이는 개인적인 폭력이 아닌 구조적인 폭력이다.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권리는 종종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인권과 동물권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국내인권과 국제인권의 관계를 비교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내국인들의 인권은 국내에 있는 외국인들의 인권과 종종 대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한 국가의 인권은 강대국에 의해 침해되어선 안되는 국제 인권 속에서 성립될 수 있다. 따라서 국내 인권은 국제 인권을 바탕 위에 있다. 이런 관계를 동물권에 대해서도 적용해 봤을 때, 동물에 속해 있는 인간의 권리, 곧 인권은 동물권의 바탕 위에서 성립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다시 국내인권의 경우와 비교하자면, 우리의 권리는 그대로인데 국내 외국인들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의 인권이 침해당하는 것, 곧 우리가 인간다울 권리가 침해당하는 일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권리는 그대로인데 비인간 동물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동물로서 우리의 권리가 침해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는 것이 공피조성의 가족됨의 원리다. 현대의 문명은 위계적 이분법으로 공피조성의 관계를 잃었다. 그래서 인간의 계획에 의해 욕망과 수만 비정상적으로 늘어나, 지구의 땅이 썩고 결국 죽음의 문명에 놓이게 되었다. 여기서 공피조성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인간이 본래 맺어야 하는 세상과의 관계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고 있다. 다시 말해 원래 맺어야 하는 동물로서의 관계 역시 회복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세상 통치의 역할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겐 인간으로서의 세상을 통치하도록 맡기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선 비둘기에겐 비둘기로서 만물을 통치하도록 맡기실 것이다. 이 통치는 창조의 통치다.
마가의 편집으로 창작된 내러티브 속 예수는 비인간 동물을 오락거리로 여기는 로마와는 다른 눈으로 동물들을 바라보았다. 예수에게 그들은 생활의 동반자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가축화의 노예상태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정상화하는 위계적 이분법 또한 내포되어 있었다. 이것은 결국 현대 문명의 파멸을 막아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마가의 예수가 이 시대에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고 판단하기엔 이르다. 마가의 예수는 로마라는 제국주의 속에서 억압받는 하층민의 삶의 자리로 다가온다. 신자주유의와 신제국주의에 억압받고 있는 이 시대의 하층민은 새로운 빈곤자(new poor)인 자연, 그리고 비인간 동물이다. 그렇다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듯, 공피조성 안에서 새로운 삶의 자리에 맞춰 예수의 복음이 번역될 수 있다. 공피조성 안에서 인권의 근간은 동물권이다. 이는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그 신념을 견지하는 것은 언제나 실패할 일로 보인다. 그러나 단순히 세속의 가치판단을 따라가는 것은 마가복음 속 제자들과 같은 어리석음이다. 이미 승리가 선포되었다. 그날은 밤과 같이 올 것이다. 어쩌면 어쩔 수 없이 우리 문명이 밤을 맞이하고 잠든 이후에나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따라야할 삶은 죽음에 굴복한 삶이 아니다. 생명으로 승리한 삶이다. 이처럼 우리는 새 노래를 통해 새로운 기쁜 소식을 전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