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시간

기독교적 무속

사이 (SA-E) 2022. 1. 6. 02:58

내가 생각하는 십자가 이미지다.
십자가를 정말 아는 사람은 오히려, 본질적인 십자가의 이미지가 이런 것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에게 기도는 바라는 소망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영을 몸 안으로 접신하는 과정에 가깝다.
신을 모셔 질문한다.

당신이 그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당신이 세상에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당신은 이것을 나에게 왜 보여주는 것인가.

바로 그 초혼의 과정이다.
영이 내 몸을 매개로해서 전언을 세상으로 보낸다.
말씀, 혹은 행동, 혹은 내 존재 자체로 배출한다.

그러나 나도 바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딱 하나 있다.

제발 나를 죽게 해달라. 죽음을 허락해달라.

무당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오히려
그런 기도를 드리지 않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외에 다른 가능한 기도가 있다면 영이 떠나게 해달라는 기도겠지.

그것도 물론 바라는 바이긴 하나, 언제나 앞에 것보다 진심일 수 없었다.
영에게는 거짓을 말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기도는 언제나 그 하나다.

죽음의 기도 앞에선 언제나 저 십자가로 돌아온다.
저 십자가에서 영은 내 안의 진실을 드러내 준다.

네가 바라는 것이 정말 죽음이었냐고.
전언으로부터 도망가려는 것 아니었냐고.
몸이 전언이 되는 삶을 피하고 싶은 것 아니었냐고.

내가 아는 신은 다른 종교와 다르다.
내가 영을 떠나게 해달라고 빌면,
언제나 그런 나를 책망하지 않고 고생 많았다고 감싸안아준다.

그러나 가장 깊은 곳에 진심은 영을 떠나게 해달라는 게 아니다.
결국 진짜 죽음만을 남겨 놓는다.
내가 죽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중 사실은 죽음이 아니었던 것을 갈라내준다.

죽음과 가까워 보였던 다른 것은 굿이다.
삶이라는 굿, 투쟁이라는 굿이다.
영이 떠나지 않았기에 끊임없이 나는 굿이 된다.
저 흔들리는 밧줄이 된다.
말씀, 행동, 존재로 전언이 화육한다.

굿과 근원적 죽음을 분간하는 능력이
다른 종교의 무당에겐 있는가 모르겠다.
나는 다른 종교에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 혹은 무당들의 바람은 언제나 죽음이고
그렇게 굿과 근원적 죽음이 뒤섞인 존재로
근원적인 춤과 노래가 되는 것 아닐까.

미래를 아는 것이 허락 되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 하늘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
질병이 무엇인지 유전자가 무엇인지 생명과 정신이 무엇인지가 알려졌다.

바로 이 시대에 맞춰 부름 받은 무당들이 있다.
그것은 당연히 기독교에도 기독교가 아니래도 있다.
그러나 세상도 아마 그 무당을 몰라볼 것이며, 그 자신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눈을 감고 누워서
죽음을 바라는 기도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