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림은 함께 할 때 가능하다
기도회를 가던 길 버스에서 20년 인연이었던 목도리를 두고 내렸다.
어머니에게 받아 쓴 목도리라, 이것이 얼마나 된 목도리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별 거 아니라면 별 거 아닌데, 괜히 마음 한 곳이 비어버렸다.
오히려 추위는 별 것 아니었다.
현장의 증언 시간, 사장님의 발언 중에 인연에는 유통기한이 있다고. 참 타이밍 잘 맞게도.
40년의 인연이 사라져 가는 것을, 인연으로 채워졌던 그 골목을 이제는 자본이 장악한 것을 마주하는 사람의 마음은 무엇일까.
만나는 그 날에 대한 얘기를 나눠주신다.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종말론적인 그 언젠가가 지금의 만남이 되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예배라고 한다.
떠난 20년의 인연은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종말에서 우리는 이미 만났다.
떠난 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더 좋은 새로운 인연이란 것은 없다.
다만 종말론적 현재의 만남이, 인연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손을 놓친다. 무엇도 대신 채워 줄 수 없다. 길을 잃는다.
잃은 것을 잃은 채로 있을 수 있도록 해주는 건, 내가 붙잡는 미련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항상 잃기 전으로만 되돌려 버린다. 그래서 오히려 잃어버림이 가능하지 못하게 한다.
잃어버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바로 옆에 있는 이들이 잡아주는 손이다.
그 종말론적 현재가, 현실 불가능한 만남을 지금여기의 현재로 불러온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잃어버릴 수 있게 된다.
그랬다.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은 잃어버림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잃어버림은 언제나 함께 해주는 것이다. 예배 같은 우리가 함께 잃어버려 주는 것이다.
바로 그 함께의 순간에 그 날이 종말의 만남으로 되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