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시간

성탄, 동물이 온다

사이 (SA-E) 2024. 12. 24. 17:12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말 밥통)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 (누가복음 2:12)

예수는 유대교 운동을 한 아랍계 흑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예수는 백인이고, 유대교 운동도 하지 않는다.
예수가 몸이라는 것은 구체성을 말하는 것이지, 특정 인종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구체성은 구체적 위치성이다. 그 위치성을 드러내는 혼종의 존재로서 예수는 흑인이 아닐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종이 바뀌었듯 젠더도 바뀔 수 있다. 예수는 젠더퀴어나 여성의 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종 자체도 바뀌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예수가 비인간 동물의 위치성을 가지는 것은, 그가 비인간의 공간에서 탄생하는 존재라는 것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그 탄생은 시민의 것이 아닌 오히려 유인원의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었다(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을 생각해보라).
물론 그 동물은 혼종 된 존재로서 인간의 해방 까지도 말했다. 좀 더 정확히는 폭력의 구조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다만 그가 인간의 언어로 전하는 유인원이었을 뿐이다.
말의 밥통에서 나온 그는 또한 말의 혼종이기도 하다. 동물 자체다. 땅에 속해 구성되는 움직이는 존재다.
이로써 이 해방의 운동은 인간 세력의 운동이 아니라, 인간도 동물로서 부름 받는, 온땅의 운동, 생명 자체의 운동으로 확장된다.

이 탄생은 표징이다. 인간의 힘으로 다른 인간을 이기는 운동이 아니다. 동물이 되는 운동이다. 동물을 해방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해방이 동물이 된다. 다시 말해 땅의 존재로 돌아간다. 인간이 땅의 주인 노릇을 하는 위력에서 모든 폭력이 연결되어 있음을 고발한다.

오늘도 대멸종 집단살해의 전쟁 가운데 생명이 태어나고 구조적 살해를 당한다. 노예 수용소에서 생명이 태어나고 도살장 갈고리 십자가에서 살해당한다. 드디어 우리의 탄생과 죽음이, 모든 곳이 위력과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가 밝히 드러난다.
구원이 여기에 있다. 성탄, 다시말해 구원이 여기로 온다. 해방이 여기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