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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의적 성경해석의 위험성
'성경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라는 말이 존재합니다만, 우리는 생각처럼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가치관이나 사회문화가 필요한 문자를 선택하고 해석하는 기준이 되곤 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자기본위로 해석하고 있는 경우에는, 성경구절을 단지 자기주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해의 움직임과 관련된 구절은, 시대의 가치관이 해석에 영향을 미쳤던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시편 19:5-6)
천동설의 시대에서는 태양이 움직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위의 구절이 천동설을 증명한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은 위 성경구절에 반하는 것이라고 여겨졌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위의 성경 구절이 천동설을 증명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모두가 압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생활 속에서 해가 뜬다, 해가 진다는 표현을 사용하곤 합니다. 위의 구절은 이제 비유적 표현이라고 이해되어 집니다.
애초에 성경이 말하고자 한 것이 천동설이 아니었을 뿐입니다. 천동설은 단지 한 시대의 가치관이었을 뿐입니다.
시대풍조가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 일들이 벌어져왔고, 이는 종종 매우 나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노예제도나 여성차별, 원주민 학살 등은 모두 성경에 써 있는 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되어졌던 일들입니다. 성경 그대로를 차용하였지만 그 시대의 사회풍조에 기반하여 문자의 선택과 해석이 결정되었습니다.
이렇듯 사회문화에 속한 가치관이 성경의 주장 그대로인 것 처럼 혼동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를 차용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성경을 따른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회풍조를 성경보다도 위에 두는 일 입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단순히 사회풍조를 따르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 시대의 가치관을 넘어서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가 있습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넘어오는 일, 노예제 등 차별에서 벗어나는 일 모두는 그 시대의 사회풍조를 따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에 반응한 일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동성애자의 존재와 성경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에서 언급한 것은 동성애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양쪽 다 자의적인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판단의 근거가 단순히 사회풍조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에 귀 기울인 것인지를 분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2.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와 사실
우리는 자신이 살고있는 시대의 영향 속에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판단을 할 때, 그것이 정말 성경에 기반한 것인지 어쩌면 사회풍조에 기반한 것이었는지 구분하는 일은, 쉽게 느껴지는 것과는 달리 그리 수월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그 분별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오히려 성경을 쓴 이는 그러한 분별을 원하실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 분별을 위해 시대에 맞춰 주어지는 지혜가 있습니다.
천동설의 시대엔 성경에 써있는 구절이 천동설과 같다고 믿고 있더라도 성경을 잘못 읽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 관련된 분별이 필요했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체의 비밀이 밝혀지는 시대에는 그에 맞춰 필요한 지혜가 주어졌습니다. 이때, 지동설의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는데도 성경은 천동설이 맞다고 써 있다며 핍박하는 것은 사실은 성경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천동설의 사회풍조를 따른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의 해석과 적용이 시대나 사회에 따라 달라지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물이 흐르듯 시대는 변합니다. 성경은 언어의 분화가 부족한 고대 문자로 쓰여졌으며, 무엇보다 제한된 시대를 배경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로인해 파생되는 비본질이 존재할 수 밖에 없지요.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답습만 하는 것은 오히려 본질을 막는 태도입니다.
흐르는 시대 속에서 그 본래의 의미가 지켜지도록, 그 시대에 맞춰진 지혜가 주어집니다. 시대에 맞춰 지혜가 주어지는 것은 성경 안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으로 주장되어지는 여러 규례의 비본질성을 지적하곤 하셨습니다. 예수는 사회에 의해 선택된 문자가 아니라 성경이 정말 전하고자 하는 본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예수가 당하셨던 것 처럼,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는 종종 사회풍조에 의해 핍박 받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엔 사회풍조가 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 지혜는 사실에 근거하며, 사실이란 것은 결국에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은 중요한 지표입니다. 세상의 원리를 지은 존재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그가 지은 원리와 상충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회풍조를 따르는 이들은 사실을 조작합니다. 여성이 왜 열등한지, 다른 인종이나 민족이 왜 열등한지에 대한 다양한 연구결과들이 나왔습니다. 또한 종종 원인과 결과를 바꿔서 해석하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약탈로 끔찍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이 그렇게 밖에 생활하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들이니 자신들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식이지요. 자신들의 주장이야 말로 성경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라는 식으로 순환논리의 오류를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그의 주장을 부정하면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태도를 보이곤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성경 문구들을 도구로 쓴 그의 주장은, 성경이 아닌 사회풍조에 기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주장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일은, 세상의 원리를 주관하는 존재보다도 사회풍조와 자기자신을 더 높이두는 일입니다. 이것이 자기와 타인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것을 우리는 지켜봐 왔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더 높이 두는 것을 불경이라고 합니다. 불경이 초래하는 불행을 보면 왜 불경을 가장 큰 죄라고 하는지도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의 주장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사실에 대해 그가 보이는 태도가 어떠한 지를 보면 그의 주장이 성경에 기반한 것인지, 사회풍조에 기반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인권의식의 향상으로 동성애자 인권에 대한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권의식이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와 동일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차별 당하게 된 이들의 위치에 함께 하는 것은 성경적인 것입니다만, 그것은 성경을 피해자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와 같이 동성애와 관련된 성경 해석의 문제 또한 동성애에 대한 사회 분위기 또는 동정심에 편승해서 이뤄지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것이 사회풍조와 다르더라도 진짜 사실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밝혀진 사실들은, 성경이 제멋대로 해석되지 않고 온전한 빛을 비추도록 이 시대에 주어진 선물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동성애에 관련된 사실을 먼저 검토해 보고자 합니다. 사실을 통해 무엇이 성경의 본래 뜻이 었는지, 무엇이 사회풍조였는지를 분별할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동성애에 대한 사실
현대사회는 성소수자에 대한 가장 많은 진실을 알게된 사회입니다. 이중 동성애에 관련된 이슈는 성소수자에 관련된 주된 이슈이긴 하지만, 여러 이슈 중 일부일 뿐이기도 합니다. '성소수자 =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기록된 것은 남성 간의 성관계에 관한 언급이며, 이 글의 목적이 성경적인 분별이기때문에, 주된 논의는 동성애를 중심으로 이끌고 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동성애에 관련된 몇가지 사실 문제를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성애에 관련된 유전자가 있더라도 동성 사이에서는 자손이 생기지 않으므로 결국 없어졌을 것 아니냐며, 동성애는 선천적일 수 없고 학습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관련된 유전자를 밝혀내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유전자와 관련된 일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닙니다. 성격에 관련된 유전자만 해도 밝혀진 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요.
동성간 성관계는 인간 이외의 동물들에게서도 꾸준히 발견되고 있으며, 따라서 단순히 학습한 것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동물에서 나타나는 동성간 성관계는 영장류에서 뿐 아니라, 다른 포유류, 조류나 곤충에 이르기까지 성을 가진 동물 전반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동물행동 연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1999년까지의 연구에서만 해도 무려 470종 이상의 종에서 동성간 성관계가 보고되었었는데, 2006년에는 1천 500여종에서 보고되면서, 동물에서 동성간 성관계는 점점 보편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동성간 성관계에 대한 유전자 역시도 발견된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경우들을 학습이라고 분석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사랑과 성행위가 같은 개념이 아닌 것 처럼 동성애와 동성간 성행위가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동성간 성관계를 보이는 종들이 동성에게 끌림을 느끼는 성지향, 곧 동성애가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동물 사이에서 동성간 성행위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처럼 동성애는 학습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확률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동성애는 후천적인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유전자에 의한 결정에서 후천적인 요소가 영향을 주는 것은 생물의 사회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동성애가 어떠한 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후천적인 영향이 있다고 선천적인 현상이 아니게 되지는 않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동성애가 특별히 도덕적 문란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정상적인 환경에서는 결국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유전자적 확률의 문제는 도덕의 타락에 따라 더 높은 확률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건전하다고 그 유전자적 확률이 줄어들거나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유전자에 영향을 주는 요소가 있다면 그 확률이 변할 수는 있을 뿐이지요.
동성애는 성적 문란함과는 관련없이 나타납니다. 동성애가 나타나는 것이 성적으로 문란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가장 일반적인 성지향인 이성애가 성적으로 문란한 사회라면 마찬가지로 동성애도 문란할 뿐입니다. 동성애가 사회의 문란함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문란함이 동성애에 반영되는 것입니다.
물론 더 일반적인 확률로 나타나는 성지향은 이성애입니다. 그렇다고 확률이 적으니까 동성애가 이상성애라는 뜻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적은 확률이라는 것과 이상이 있다는 것은 동일한 개념이 아닙니다. RH- 혈액형을 질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동성에게 끌림을 느끼는 것이, 생식능력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정지끼리 만나서 수정이 되게 하거나 난자끼리 만나서 수정이 되게 하는 일도 아닙니다. 단순히 소수의 성지향일 뿐입니다.
성지향을 병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클라인펠터 증후군 같은 유전병과 달리 성지향은 증상이 아닙니다. 성지향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과거 동성애를 이상성애 중 하나로 판단했었다는 자료는 남아있습니다만, 그것이 의학적인 근거가 충분치 않은 오류였음은 이미 사실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동성애자는 정상적인 가정을 이룰 수 없으니 이상한 거 아니냐는 입장은 의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것입니다. 동성애가 이상한 것이라는 사회문화가 있듯이 동성애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사회 문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동성애자들이 정상적인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사회문화도 있고 그럴 수 없는 사회문화도 있습니다.
동성애는 학습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선천적인 것이므로 동성애자 부모라고 하여 자녀가 혼란을 겪는 일은 없습니다. 부모가 동성애자인 것 자체가 이상한 거 아니냐는 주장은 사실에 근거하는 주장이 아니라 사회문화에 근거하는 주장입니다. 사실관계에 있어서 동성애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예시를 위해 만약 그렇다고 가정해봅시다. 정신적 문제 중 하나로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부모도 있지요. 그런 사람이 부모인 것 자체가 이상한 거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밝혀진 사실입니다. 사실이란 것은 동성애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가치판단과 상관없이 동성애와 관련된 사실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동성애는 더 적은 확률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것입니다.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병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동성애자가 아니었는데 동성애자가 되었다는 사례나 동성애를 고친 사례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사례들이 무엇인지를 다루고자 합니다.
4. 동성애가 고쳐진 사례?
우리는 동성애가 고쳐졌다는 사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례가 존재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한 사례가 무엇인지는 성소수자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알게 된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성애자가 성소수자 중 하나인 것처럼, 동성애자 안에서도 다양한 분류가 있습니다.
성적 끌림을 느끼는 정도가 일반적인 경우도 있고, 없거나 희미하게 태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성애자나 반무성애자의 특성에 가까운 동성애자들이 있습니다.
동성애를 하던 사람 중에서도 무리 없이 이성과의 결혼생활이 가능한 경우도 있는데, 양성애자라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양성애자라고해서 남성과 여성에 똑같이 끌림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한쪽 성에 대해서는 그 끌림이 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성애자가 노력한다고 양성애자가 되거나 무성애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성애자가 노력한다고 그렇게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애초부터 양성애자고 애초부터 무성애자 입니다. 이성애가 조절한다고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매우 소수의 경우에 자신의 성지향을 조절이 가능하게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태어나지 않은 경우는 조절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조절 가능하다고해서 동성애 혹은 이성애가 고쳐질 수 있고, 치료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높은 연령대일수록 동성애자의 비율이 낮다는 조사결과도 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과 억압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성지향이나 성정체성은 유전자에 의한 영향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영향을 받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따라서 동성애에 대한 주위의 억압 때문에, 원래 그의 자연스러운 성지향인 동성애의 성향이 억압되는 것입니다. 고연령의 동성애자 비율은 낮다면, 그 시대의 사회적 억압이라는 후천적 요인이 더 컸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더 배타적인 환경이라면 특히나 청소년기의 자살률이 높아집니다. 그렇게 영향을 주는 환경이 있다면 고연령층에서 동성애의 비율이 낮게 나타나는 것이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현상은 동성애가 학습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동성애가 후천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면, 이는 이성애도 후천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이성애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게 되지는 않습니다. 동성애도 마찬가지 입니다.
동성애의 성지향을 가졌다가 이성애의 성지향을 가지게 되는 경우는 분명 존재합니다. 애초부터 그렇게 변할 수 있도록 태어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모든 동성애자가 이성애의 성지향을 갖도록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억압이 큰 환경에서 자랐어도 동성애라는 정체성이 억압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사회적으로 그다지 큰 억압이 없더라도 동성애의 정체성이 억압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원래부터 변할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애자에서 동성애자가 된 사람이 있다고 모든 이성애자가 동성애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다른 경우로, 본인의 원래 성정체성을 회복하는 경우와 달리, 성정체성 자체가 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생 동안 한 번 변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여러 번 변하도록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변하는 시기도 각기 다르고, 여러 번 변하는 사람의 경우 그 주기도 여러가지 입니다. 그 모든 사례가 그렇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배운다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동성애자의 경우 어렸을 때의 성폭행이나 정신적 충격이 발견되는 사례가 있습니다. 이를 보고 동성애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후천적인 영향이 있었다는 것이 고칠 수 있다는 것과 동일한 개념은 아닙니다. 어쩌면 어렸을 때 발생한 사건 때문에 단지 더 빨리 자신의 성지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는 경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동성애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지향을 발견하는 일은 오히려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동성애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동성애에 대한 차별 때문에, 그 본연의 성지향이 부당하게 억압될 수 밖에 없던 사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5. 동성애의 다양성
우린 앞서서 동성애가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은 대표적인 편견의 산물임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지금은 동성애의 범위를 규정하기 애매한 경우들 또한 살펴보고자 합니다.
동성애는 이성애, 양성애, 무성애 등 다양한 성지향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성적끌림을 느끼지 않는 무성애자 중에서는 연애감정은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중에는 동성에 대해 연애감정을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동성로멘틱 무성애자라고 하며, 성적인 끌림은 없지만 동성에게 연애감정을 느끼는 경우입니다. 이들은 동성애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해서 이성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적인 끌림을 느끼는 성과 성적인 끌림을 느끼는 성이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남녀의 육체 관계를 갖는 것을 좋아하지만, 정신적인 사랑은 동성에게만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편 육체의 성과 정신적 성이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여자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남자인 사람이, 동성인 남자를 좋아하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이 경우 남자로서 남자와 관계를 맺는 것인데, 드러나는 육체로는 여성과 남성 간의 관계처럼 보여집니다.
이러한 다양한 사례들은 정신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들은 어떤 증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태어나는 현상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성애자라고 하더라도 동성애적 기질이 100%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작동할지 않을 정도로 이성애적 기질이 강할 뿐입니다. 또한 그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도 다릅니다. 남성 이성애자에게서 나타나는 동성애적 기질은 여성보다 낮은 경우가 많은데, 특히 그 기질이 낮은 사람일수록 어떻게 동성애적 기질이 있을 수 있는지 자체를 납득하는 것이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성격이 제각각이듯 이성애적 기질과 동성애적 기질의 비율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이성애적 성향이 좀 더 강하게 나타나긴해도, 동성애적 성향 역시도 어느 정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동성애에 대한 사실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는 동성애를 지지한다는 가치판단과 상관없는, 사실에 대한 정리일 뿐입니다.
사실을 점검하는 것은 성경을 온전히 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는 사회풍조가 영향을 미칩니다. 이에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가 있어 성경 자체의 본래 뜻을 분별하도록 돕습니다. 그 지혜는 시대에 허락된 사실과 충돌되지 않습니다. 허락된 사실을 통해, 어떤 주장에 대해 그것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사회풍조를 따른 것이었는지를 판별할 수 있게 됩니다.
이에 따라 동성애와 관련된 사실들을 먼저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그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성경 속에서 동성애와 관련되는 것으로 고려되고 있는 구절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6. 창세기 1:27-28과 동성애의 관계
성경에서는 동성애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는 여러 구절이 있습니다. 저는 창세기, 레위기, 로마서, 고린도 전서 등 대표적인 7개의 구절을 사실을 기반하여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각 구절마다의 다뤄지는 주된 쟁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창세기 1:27-28)
창조섭리라고 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존재하고,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이 이뤄집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과 상관없이 성관계를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임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이나, 사고로 생식기능을 잃은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이 수정능력이 없다고하여 창조질서를 흐트러뜨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남성과 여성이 존재하고,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이 이뤄지는 것에 반대되는 세력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들은 생식이 가능하지 않으니 이들의 성관계는 욕정이므로 성관계를 가지면 안된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류의 생육과 번성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성별이분법의 질서 안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간성(intersexual)이 있습니다. 이들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육체로 태어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원해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선천적이라는 측면에서 이들의 존재는 천부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존재가 있다고하여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다는 창조섭리가 잘못된 것이라고 하지도 않으며, 이들이 창조섭리를 반하는 세력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그렇게 태어났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류의 생육과 번성에 동참합니다.
동성애는 선천적인 것입니다. 동성애자 역시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류의 생육과 번성에 동참합니다.
오히려 현대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별의 문제에 있어서, 동성애를 대표로 하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이해는 성별 이분법적인 사회가 만들어내는 구조적인 불합리를 타파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습니다. 성차별의 사회가 아니라 여성이 진성한 자신으로서, 남성이 진정한 자신으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사회 입니다.
유독 동성애가 위에서 언급되는 창조섭리를 흐트러뜨린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희박합니다. 이 구절과 관련된 논쟁에 한해서는, 동성애가 창조질서를 반한다는 판단은 사실 관계에 근거하기 보다는 혐오하는 사회풍조에 기인하고 있을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것이 '동성애는 성경적으로 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권에 대해 호의적인 현대사회의 풍조가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인 해석을 좌우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동성애를 혐오하는 현대사회의 또 다른 풍조가 성경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렇기에 다른 구절들도 살펴봐야 합니다.
7. 창세기 19:4-8과 동성애의 관계
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돔 성 각 마을에서,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쌌다. 그들은 롯에게 소리쳤다.
"오늘 밤에 너의 집에 온 그 남자들이 어디에 있느냐? 그들을 우리에게로 데리고 나오너라.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 하겠다."
롯은 그 남자들을 만나려고 바깥으로 나가서는, 뒤로 문을 걸어 잠그고, 그들을 타일렀다.
"여보게, 제발 이러지들 말게. 이건 악한 짓일세. 이것 보게, 나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이 있네. 그 아이들을 자네들에게 줄 터이니, 그 아이들을 자네들 좋을 대로 하게. 그러나 이 남자들은 나의 집에 보호받으러 온 손님들이니까,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게." (창세기 19:4-8)
마을 모든 남자가 외부에서 온 남성과의 관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문자 그대로 마을의 모든 남자는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상당한 무리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는 도무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동성애에서의 성관계도 당연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관계입니다. 성적 끌림이 동성을 향할 뿐 이성애와 다른 것이 더 이상한 일입니다. 성관계는 양쪽의 깊은 유대감이 진행되고나서 서로에 대한 책임을 전제하에 이뤄지게 됩니다.
위와 같은 관계는 동성애에서 생각할 수도 없는 관계입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사회에서 이성애가 문란하듯 동성애도 문란할 수 있습니다만, 위의 상황은 그런 것으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집단적인 폭력이자 범죄일 뿐입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이성애자는 동성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습니다. 동성애자도 확률이 있습니다. 마을의 모든 남성이 이성애자가 아닐 수는 없습니다. 동성애라는 틀에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위의 구절이 아무리 동성 간의 성관계를 내포한다고 해도, 위의 상황은 동성애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소돔에서는 동성 간 성행위가 유행했다고 하나, 그것은 위의 상황과는 다릅니다. 또한 소돔에서는 보통 욕정에 근거한 무분별한 동성 간 성행위가 존재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과 동성애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욕정에 근거한 무분별한 이성 간 성행위가 존재한다고 이성애가 그것과 동일한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동성애 역시도 정서적인 깊은 유대감과 서로에 대한 책임감의 열매로서 성관계가 이뤄집니다. 욕정을 위한 동성간의 성관계는 그대로 욕정을 위한 동성간의 성관계일 뿐입니다. 그것과 동성애는 다른 것입니다. 소돔에서의 행위는 동성애와는 다른 종류입니다.
위와 같은 장면을 들어 동성애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논리도 맞지 않을 뿐더러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전달하는 행동입니다. 소돔에서의 상황을 동성애라고 주장하는 것도 동성애에 대한 사실 관계에 부합하지 않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혐오하는 사회풍조를 기반하고 있으며, 그렇게 거짓 개념을 전파하는 것 역시도 사회풍조를 성경의 권위보다 위에 두는 일입니다.
한편 롯은 남자손님대신 처녀인 두 딸들을 내어준다고 얘기합니다. 정말로 딸을 내어 준다면 간음의 현장을 만드는 것이며 이는 죄에 해당할 것입니다. 실제로 롯은 딸을 내어주지는 않습니다. 저는 롯이 던진 메시지는 책임있는 관계를 가지라는 경고가 아니었을까 판단합니다. 롯은 성관계는 가정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은 당시에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동성애는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성관계를 통해 서로의 관계를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따라서 많은 동성애자들이 가정을 꿈꿉니다. 책임이나 생육과 상관없는 성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공수정을 할 수도 있고, 양자를 들일 수도 있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가 존재하는 사회가 그들의 관계를 인정하고 있지 않는 것 뿐입니다. 동성애자가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지도 않으며, 그들이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추구하려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혐오하는 사회가 그들의 건강한 관계를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과 관계를 바꿔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혐오하는 사회풍조를 따를 때 쉽게 벌어집니다. 곧 성경의 뜻보다 자기권위를 더 위에 두는 것입니다.
적어도 동성애 자체가 건강하지 않은 관계라는 것은 위의 구절로는 절대 주장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구절이 '동성애는 성경적으로 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도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위 구절 자체로는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과 동성애와 관련된 사실이 무엇인지를 다루었을 뿐입니다.
8. 레위기 18장, 20장과 동성애의 관계
레위기 18장과 20장의 내용은 매우 유사해서, 18장은 성관계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으나 자기 아이를 몰렉에게 제물로 바치는 행위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20장은 처음에 몰렉에게 아이를 바치는 내용을 배치하고 강조하긴 했지만, 이후에는 성관계에 관한 율법을 주로을 다룹니다. 여기서 성관계에 대한 내용으로는 근친상간과 관련된 다양한 사례들, 간통에 해당하는 것들, 남자 간 성관계, 수간 등이 언급됩니다.
이 중 남자 간 성관계에 대한 구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여자와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안 된다. 그것은 망측한 짓이다. (레 18:22)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이므로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죄값으로 죽는 것이다. (레 20:13)
위의 구절이 남성 간 성관계를 말하지 여성 간 성관계는 말하지 않으므로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정당한 정황을 고려해 봐야 합니다.
성경이 쓰여진 고대 중동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나타난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양한 남성우월주의 사회 안에서, 여성 간의 성관계는 존재하지도 않거나 매우 천한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남성 간의 성관계는 이성애보다도 오히려 더 정신적인 것이며, 우월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남색이라는 단어 자체가 남성중심적 단어입니다. 남색이란 것이 남자간의 성관계를 말하지만, 여색이란 것이 여성간의 성관계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철저히 남성만을 주체로 보고 있습니다. 여성에 대해서는 성관계를 언급할 수 없었습니다. 성관계는 남자가 하는 것으로 여성은 주체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하게 말해 여성 간 성관계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성관계는 남자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정황을 고려했을 때 남성만 언급한 일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돼지고기와 새우를 먹는 것이 여호와를 믿지 않는 것과 동일해지는 사회였습니다. 그냥 그 사회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것으로 성경의 정당성이 가려지지 않습니다.
위의 문자 그대로라 하면, 남성 간에 성관계에서는 문자 그대로 '여자와 교합하듯' 질내삽입이 불가능한데 애초에 성경은 불가능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합니다. 물론 넌센스입니다. 또한 여자에게 하듯 남자에게 하는 것이 항문성교라고 하면, 애초에 여성과 남성의 성관계가 항문성교와 동일한 것은 아니니 다시 성경은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넌센스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넌센스만은 아닌 지점이 있습니다. 성기에 직접 삽입하지 않는 구강이나 항문을 통한 방식은 강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성경의 오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정당한 정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성기를 통한 관계가 아니니 엄밀히 말해 그것은 성관계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그것도 성관계로 고려되어져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는 그러한 의미일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도 성기간 접촉이 아니더라도 유사강간이라고 분류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의 구절을 두고, 성경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해가 움직인다는 비유를 들어 성경이 지동설과 부합하지 않으므로 오류가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식의 말장난은 본래 뜻을 곡해시키는 것이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본래 뜻이 가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오류를 찾아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쉬운 일입니다. 자기주장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살아있는 책입니다. 시대의 지혜를 통해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과 부합하고 오류가 없습니다.
따라서 위의 구절은 동성 간의 관계에서도 성관계가 성립되며, 죄가 되는 성관계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당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관련된 시대적 정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대시대에서 흔히 벌어졌던 동성 간의 성관계는 서로를 책임지고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현대에 나타나는 동성애와 본질적으로 다른 지점입니다. 물론 이것이 그 시대의 동성애자들의 성향이 그러했다는 걸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대에는 동성애자라고해도 책임 있는 관계를 맺을 만한 사회적인 요건이 되지 않았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과는 동일한 규칙이 있던 사회이기도 했으나 전혀 다른 규칙이 존재하는 사회이기도 했습니다.
성경의 시대에서도 정욕에 기반한 남성 간의 성관계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이 쓰여진 당시 사회에서는 이성 간의 성관계는 곧 서로에 대한 평생의 책임이었습니다. 반면 남성 간 성관계는 그러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책임감에 기반하지 않고 성을 사용하는 것은 정욕입니다. 이는 깊은 유대감과 책임에 기반한 동성애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의 구절이 그러한 동성애를 포함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해가 움직인다는 구절의 사례처럼 위의 구절만으로는 그러한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사실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에 부합하는 지혜야말로 나의 판단보다 성경의 권위를 위에 두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참 즐겁게 쉬고 있을 때에, 그 성읍의 불량한 남자들이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싸고, 문을 두드리며, 집 주인인 노인에게 소리질렀다.
"노인의 집에 들어온 그 남자를 끌어내시오. 우리가 그 사람하고 관계를 좀 해야겠소."
그러자 주인 노인이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보시오, 젊은이들, 제발 이러지 마시오. 이 사람은 우리 집에 온 손님이니, 그에게 악한 일을 하지 마시오. 제발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마시오. 여기 처녀인 내 딸과 그 사람의 첩을 내가 끌어내다 줄 터이니, 그들을 데리고 가서 당신들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이 남자에게만은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마시오."
그러나 그 불량배들은 노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레위 사람은 자기 첩을 밖으로 내보내어 그 남자들에게 주었다. 그러자 그 남자들이 밤새도록 그 여자를 윤간하여 욕보인 뒤에, 새벽에 동이 틀 때에야 놓아 주었다. (사사기 19:22-25)
사사기에서는 앞서 소돔에서와 비슷한 일화가 언급됩니다. 처녀인 딸을 언급하는 내용도 비슷합니다. 남자를 내놓으라고 했던 이들이 성적 끌림을 느끼지 못할 여성을 상대로 윤간을 벌이는 것을 봐도 이것이 동성애로는 전혀 설명되지 못한다는 점도 비슷합니다.
비슷한 예를 다시 언급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위와 같은 일화를 보며 동성애는 죄라고 주장하는 것 처럼 성경을 읽을 때 인과관계를 뒤집어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제사 의식에서 남성 간 성행위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그냥 남성 간 성행위가 제사관계에 씌였던 것입니다. 그냥 그런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것과 동성애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동성애 때문에 죄를 짓게 된 게 아닙니다.
고대사회에서는 남창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창녀가 존재한다고 이성 간의 사랑과 성관계 자체가 죄가 아니듯이, 남창이 존재한다고 동성애와 동성간 성관계가 죄라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창녀의 존재가 이성애 때문이 아닙니다. 남창의 존재가 동성애 때문이 아닙니다.
인과관계를 뒤집을 수 있는 논리는 혐오를 배경으로 합니다.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하는 사회풍조를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들이 불임부부와 같이 창조섭리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에 함께한다는 것은 앞서 설명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해석은 자기 판단으로서가 아니라 성경 자체가 주체가 되어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로 읽어야 한다는 것도 앞서 설명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동성애와 죄성을 연관된 것으로 보는 주장은, 애초에 동성과의 성관계에 대해 본능적으로 가지는 거부감이 근거가 될 확률이 높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이성애자들이 동성과의 성관계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지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성적지향입니다. 그것은 동성애자가 동성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적지향일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자기느낌이 성경에 대체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은 위와는 또 다른 문제들 속에 놓여 있습니다.
예를들어 동성애자 사이의 에이즈의 비율이 높습니다. 항문성교라고 해서 그렇게 감염확률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님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데에는 분명 어떤 이상이 있는 것입니다. 이를두고 동성애가 문제라는 해석이 대표적인 인과관계를 뒤집는 혐오에 기인한 판단입니다.
일본이 하나님을 잘 믿어서 경제가 부강하고 장수하는 것이 아니며, 아프리카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습니다. 동성애자 사이의 감염확률도 그들이 사회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내몰렸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일 뿐입니다. 혐오와 차별이 그들을 건강하지 못한 관계 속으로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평균 청소년 자살률보다 월등히 높은 동성애자 청소년 자살률도 실재하는 차별을 증거하는 또하나의 지표가 됩니다.
인과관계를 뒤집어서 동성애가 에이즈를 퍼뜨리고 자살로 몰아간다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는 이미 존재하는 차별에 혐오를 더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의 진정한 뜻을 밝혀주는 사실들은 그러한 주장과 전혀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주장은 오로지 혐오하는 사회풍조에 기반할 때에만 정당성을 갖는 것입니다.
10. 로마서 1:26-27과 동성애의 관계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 속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 (로마서 1:26-27)
위의 구절을 두고 '죄된 정욕의 결과가 동성 간 성관계라고 말하고 있다'고 읽는 것이 불가능 해석은 아닙니다. 이러한 해석이 사회풍조를 따른 것인지,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를 따른 것인지는 사실이 무엇인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동성애에서는 유대감과 책임이 있습니다. 불임부부가 그들의 성관계로 아이가 생기지 않더라도 그들의 관계가 정욕에 기반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동성애는 정욕에 기반한 것이 아닙니다.
현대사회에서도 남녀 간에 바른 관계가 있는 반면 그와 달리 정욕에 따르는 바르지 않은 관계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동성애 안에서도 바른 관계가 있는 반면 그와 달리 정욕에 따르는 바르지 않은 관계가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도 성경시대의 남색 처럼 남자가 남자를 상대로 부끄러운 성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동성애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남녀 사이에 간음이 존재한다고, 그것이 남녀 사이의 사랑 자체와 동일한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위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로마서 1:23-24)
위의 부끄러운 정욕은 사람들의 마음의 욕정이라고 합니다. 그 원인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자신이 주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지향의 하나인 동성애는 그것과 관련이 없습니다. 동물들에게서 보여지는 동성 간 성관계가 동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부정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자연스러운 것,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천부적인 성지향입니다.
물론 인간의 타락의 결과로 땅이 썩게 되어 동물들도 동성간 성관계를 하게 되었다는 논리를 펼칠 수는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와 같은 맥락으로 죄의 결과로 사람에게 사망도 들어온 것이고, 임신도 생기고, 수고하는 노동을 하게 되었다는 개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개념이 존재한다고 해서 임신과 수고하는 노동이 죄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위의 논리가 존재한다고 해서 동성애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위의 구절을 보면서 동성애가 죄라고 인식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 처럼, 성경이 주체가 아니라 자기 느낌에 기반하여 성경을 단지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인과관계를 뒤집에서 생각하는 것은 주어지는 지혜에 기반하지 아니하고 혐오의 사회풍조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1. 고린도전서 6:9-10과 동성애의 관계
불의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나, 술 취하는 사람들이나, 남을 중상하는 사람들이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9-10)
신약에 등장하는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sodomites, KJV)은, 주로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homosexuals, KJV)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각각의 원어는 arsenokoites와 malakos 입니다. 직역하자면 malakos는 '부드러운 남자', arsenokoites는 '침대위의 남자'라는 정도의 뜻입니다.
전자는 동성간 성관계를 당하는 이를, 후자는 하는 이를 말하는데, 이는 나이 든 남자가 미동을 사서 관계를 갖는 것이 횡행했던 고대 헬라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분명히 이와 같이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행위, 돈으로 남창을 사는 행위 모두 동성애자들 사이에서도 분명히 죄악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행위와 사랑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동성애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sodomy 자체가 항문성교를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단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 처럼 동성애라는 성지향과 동성간 성관계라는 행위는 다른 개념입니다. 그리고 동성간 성관계와 항문성교도 동일한 개념이 아닙니다. 항문성교 자체는 이성 간 성관계에서도 벌어집니다.
arsenokoites라는 원어가 그것을 해석한 다양한 단어 중 하나인 sodomites와 동일한 단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16세기에 마틴 루터는 이 단어를 '소아성애자'라고 해석했습니다.
arsenokoites라는 원어 마저도 단어일 뿐이며 그 단어 자체가 진정한 본 뜻의 주인은 아닙니다. 그 본 뜻의 주인은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분명해지는 것은 우리가 '문자 그대로'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에 대한 문제제기 입니다. 어느 것이 문자 그대로인 것인지요. 돈으로 미동을 사는 사람들일까요?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일까요? 단순히 동성 간 성관계가 아니라 항문성교를 하는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소아성애자를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자기가 속해있는 사회문화에 소속되어 성경의 문자를 보게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말이 성경의 온전한 뜻을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주인은 우리가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알도록 인도합니다. 그래서 주어지는 것이 그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의 빛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때에 맞춰 주어진 지혜로 읽는 것이며, 이는 허락된 사실과 반하지 않습니다. 과학의 발전이나 문명의 발달이라는 상황에 얽메이지 아니하고 성경은 언제나 동일한 빛을 비춥니다.
12. 디모데전서 1:9-10과 동성애의 관계
율법이 제정된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라, 법을 어기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와, 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않은 자와, 속된 자와, 아비를 살해하는 자와, 어미를 살해하는 자와, 살인자와, 간음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사람을 유괴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를 하는 자와, 그 밖에도,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훈에 배치되는 일 때문임을 우리는 압니다. (디모데전서 19:1-10)
고린도전서와 마찬가지로 남색이 언급됩니다. 이 남색이라는 개념은 sodomy라는 개념과도, homosexual이라는 개념과도 완벽히 일치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남색이 동성애 간 성행위를 포함한다고 해서 둘이 같은 개념이 되는 것이 아니며, 또 동성 간 성행위와 동성애는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위 구절은 다만 나쁜 짓에 남색이 포함된다는 뜻입니다.
'남색'도 'homosexual'도 모두 원어를 번역한 단어입니다. 여러 번역 중 하나의 단어가 원래의 뜻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으로도 해당 단어가 소아성애로 해석되기도 하고, 그 역시도 정황상 타당성을 가집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본래 뜻을 밝히도록, 주어지는 지혜에 반응하는 일입니다. 무비판적 자기주장은 자기느낌으로 성경을 읽는 일이며,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가 아닌 사회풍조를 따르는 일입니다.
성경에는 동성애와 관련되었다고 주장되어지는 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와 같이 반복되는 일들입니다. 동성애를 말하는 구절이 많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동성애라고 판단하고 싶은 구절이 많다는 게 좀 더 사실에 부합하는 분석입니다. 성경이 정상적으로 사랑에 기반하는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고 있는 지, 그렇지 않은지는 자기느낌처럼 명확한 일이 아닙니다. 다만 사실에 부합하는 판단을 해야합니다.
크게 7가지 구절로 살펴보고 있는 성경 구절을 두고, 저는 그 구절이 '동성애를 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자기가 해석하는 구절을 들이미는 것은 성경이 아닌 자기권위일 확률이 높습니다.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이는 사실과 대치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동성애와 관련된 사실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저로써는 성경에 등장하는 표현들이 동성애와 같은 개념이라고 하기에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점이 많은 바, 이것이 동성애 자체를 말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입장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나의 충분한 능력과 자격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입니다.
정말 내가 시대에 지혜를 따르고 있던 것인지 아니면 자의적인 해석과 사회풍조를 따르고 있었는지를 구분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주님께서 밝히 보여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13. 성경과 나의 온전한 관계
성경에서 등장하는 남색은 죄로 분류됩니다. 동성애는 그러한 남색과는 다른 특성을 보이며, 현대의 동성애에서도 성경에 등장하는 남색과 같은 경우는 당연하게도 죄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남색이 아닌 동성애를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여전히 다양한 시선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동성애가 아닌 우상숭배의 제사의식이나 고대의 불평등한 관계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남색을 대표적으로 표현했을 뿐 동성애 자체를 죄로 규정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성관계를 쾌락의 도구로 이용하고, 상대를 물질화 하는 일이라면 죄라는 메시지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해석들도 결국에는 모두 사람의 해석일 뿐입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 온전합니다. 성경은 그 자신이 주체입니다. 사람의 해석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단지 사람은 시대에 허용된 지혜를 받아서, 거기에 반응하며, 성경과 관계를 맺어 가는 것입니다.
내 주장이 어떻다는 것을 논리로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본 성경으로 내가 믿는 것을 주장하면, 그것은 사실 자기 주장일 뿐입니다. 내가 얼마나 완벽한 논리를 가지고 있는 지는 생각보다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자기의 바탕에서 서로 침범할 수 없는 완벽한 논리를 세울 수 있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논리가 다른 논리에 굴복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가 주님에게 굴복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과 온전한 관계 속에 있다는 건 내가 가진 논리, 내가 해석하는 성경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를 통해 갖게 된 생각이라면, 그것은 사람을 살립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진정으로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를 통해 얻은 것이라면, 그것이 어떤 주장이더라도 얘기를 전달받은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는 데 전혀 지장이 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나의 해석으로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며, 성경 자체가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판단을 넘어 때에 맞는 말을 하게 되고, 때에 맞는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성경에 나오는 말이어서, 그를 용납하고 사랑으로 그를 살리려고 전했던 말인데, 동성애자들이 그것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동성애자가 완악한 죄인이라서가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단순히 내 본위 대로 성경을 보고, 단순히 내가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곧 내가 성경대로 인내하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상대방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주님은 밝히 보여주시기에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살립니다. 어쩌면 성경을 이용해서 자기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사회풍조를 따르며 성경을 도구로 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성경과 온전한 관계에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오히려 내가 성경의 빛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에 있는 경우에는 "나는 너를 살리려고 하는 것이다"는 것을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가 "이 사람은 나를 살리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세상에 증명해 줍니다. 이는 성경에도 나오는 이야기처럼 예수를 믿기에 구별된 삶을 사람들을 보며 주변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불러준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 삶입니다.
그저 착하게 살아서가 아닙니다.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성경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14. 예수님은 그곳으로 가서 함께 우신다
성경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성경은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내가 진정으로 사람을 살린다고 주장하는 것은 생각처럼 의미 있는 일은 아닙니다.
내 해석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 속에서 실천하는 일입니다. 내가 어쩌면 자기주장을 했던 것인지,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올바로 성경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지는 어쩌면 그리 구분하기 어려운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바로 내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이뤄지는 세상의 변화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선포하고 있는데, 나와 같은 진영에 있는 사람들의 내부의 결속력만 다지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타락한 세상의 핍박 속에서 정의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단순히 자기가 속해있는 사회풍조 속에서 자기본위대로 성경을 읽으며 자기를 높일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그와는 전혀 다릅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선포하니 그 주변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단순히 불쌍한 사람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과 동일한 마음이 되어 그들의 고통으로 함께 마음이 찢어지는 것도 핵심적인 표징입니다.
그렇기에 치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치유의 관계 안에서 그들 뿐만 아니라 바로 내가 회복 됩니다.
그렇게 서로 회복이 되어 갑니다. 그렇게 성경은 주체입니다. 성경은 빛입니다.
동성애 논란에서 진정한 핵심은, 내가 얼마나 성경을 잘 해석하고 있는지, 혹은 내가 세상 정의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가 아닙니다.
진정한 핵심은, 내가 정말 동성애자들과 삶 속에서, 생활 속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지, 나는 정말 동성애자들의 고통을 동일하게 느끼고 있는지 입니다.
세상 권력 있는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가장 의미 없는 일입니다. 동성애자들의 고통에 침묵하며 살아가는 다수의 동의를 얻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에게 똑같은 놈들이라는 취급을 받더라도 죄인이라고 낙인 찍힌 사람, 바로 그 사람, 울분 속에서 힘든 삶을 살게된 억울한 이들, 그들과 함께 하나가 되고, 서로가 위로가 되고, 그것이 주변으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침묵하고 있던 다수에게 까지 영향력이 미치는 것입니다. 성경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