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일이 우선이 되어 신학만 하고 있는 요즘, 신학을 공부할 수록 점점 더 선명해진다.
예수의 방향은 아래다. 그렇다면 신학 역시 저물어가는 토착민족의 지푸라기 숭배신과 같아져야 하는 것 아닌가?
우월해야 할 어떤 것도, 당위적이여야 할 어떤 것도 가지지 않은채로, 그저 억울한 절규들과 함께 절규하는 자비가, 신에 대한 경배이자, 그것이 구세의 통치(=주), 곧 기독 아닌가?
다시말해, 신학적으로 굳이 기독교여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 닿을 때야말로, 계시가 드디어 주인이 되는 것 아닌가?
다시말해, 서구 헬레니즘 이성이 만든 우월적 속죄론을 버릴때, 드디어 쌀 한 톨 안에도 깃든 자비의 속죄가 십자가로 들려질 것이다.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 그럴듯한 모든 이성적 논리를 벗어버리고, 구세의 통치, 곧 썩어뭉개지는 흙으로 돌아가는 그곳에서, 드디어 구세주의 이성적 논리, 기독의 신학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 신학하는 자리에 대한 이야기다.
신학생들은 신학을 공부하며 하나님을 아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박제되고 드리마로 상영되는 곳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팔레스타인도 아닌 서구 헬레니즘 십자가 속죄론이 기독교인가?
그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자본주의 세계화의 보통 한국 사람의 자리가 기독교의 자리일 수 있는가?
그보다는 예수 기독, 진흙으로 한바탕 하나된 그곳이 기독교 아닌가?
그가 서있는 곳에서 그의 신학이 시작될 것이다. 기독이 있는 곳에서야 하나님의 학문이 시작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학을 포기한다. 그 우월적 표현에 기독은 없다.
그래서 나는 기독 신학을 할 것이다. 신학함은 신학하는 자리 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신학의 자리에서는 신학이 있다. 기독의 자리에서 기독 신학이 있다.
기독의 자리에서 기독의 신학함을 흐르게 할 것이다. 들리지 않는 비명의 자리에서 함께 입이 제거되어 지는, 기독의 신학함을 할 것이다.
나는 신학이 아니라 기독 신학을 하겠다
2019. 6. 5. 2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