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시간

기독교 명상 간단 가이드 (그리고 명상과 예배와 생활의 관계)

사이 (SA-E) 2022. 1. 17. 17:09


기독교 명상은 예수의 증거를 따라 모두가 신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원리에 기초한다.
기독교 명상 역시 신, 초월, 영원, 혹은 무(無)를 마주하는 과정이다.
그것을 마주하기 위해 깊은 호흡과 함께 세상과의 하나됨을 깨닫고, 그 연결된 숨이 손끝 머리끝까지 통해 있음을 깨달으며 '지금여기'라는 현존, 실재,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 있음은 다시 없음이다. 지금여기의 인식은 그 영원에 닿기 위한 단계로서, 구분되는 것이지만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있음과 없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 영원은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보다 현실적인 것이며 동시에 현실이 아니다. 존재 이전의 존재이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스킬의 차원에 있어서 기독교적으로 명상을 한다는 것 역시, 다른 종교 전통의 명상 방법과 다르지 않다.
이는 기독교인이 빈곤인을 돕는 방법과, 다른 종교인이 빈곤인을 돕는 방법이 다르지 않은 것과 같다.
오히려 기독교는 시대의 언어에 반응하는 종교다. 다른 종교에서 발달한 탁월한 명상 교육을 활용하는 것을 두고 비기독교적인 것이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다만 그 명상에 있어서의 핵심이 무엇인지에 따라, 그것이 기독교 명상인지 아닌지가 갈라진다고 생각한다.

현대적 세계 인식을 받아들이는 기독교 명상에서는 영적 세계를 물질 세계 너머의 궁극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육체에서도 유기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영원을 만나는 것이 기독교 명상의 특징이다.
그렇기에 번뇌와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개념은 기독교 명상이 아니다.
오히려 번뇌와 고통의 한복판으로 들어갈 수 있는 힘과 분리되지 않는 것이 기독교 명상이다.
당연히 명상이기에 번뇌와 고통을 초월하나, 그 초월은 언제나 번뇌와 고통과의 더 깊은 하나됨과 붙어서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왜냐하면 기독교란, 초월적 영원이 또한 언제나 이 땅에서 영원히 육신을 입는다고 믿는 종교이며,
내버려진 곳, 아픔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 되게 하는 육신-관계로 육화한다는 것이 그 육화의 핵심에 있기 때문이다.
신이 그런 유기체적 존재이자 아픔을 향해 기울어진 선택을 하는 존재라는 이해는 생태신학과 과정신학적 신 이해이자 구약의 신 이해이기도 하며,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밝혀진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상황성과 타자 지향성은 기독교적 명상에 있어서의 핵심이다.
예를 들어 죽음의 5단계인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이 있다면, 기독교적 명상은 그 단계를 지나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던지 그 단계에 충실하도록 돕는다.
우선은 당연히 지금여기를 만나 영원에 대한 감각을 깨우고, 그것을 통해 그 감각 너머의 것을 만난다는 것은 동일하다.
그래서 5단계 중 어디에 있던지 그 안의 나를 치유한다.
그러나 그 목적은 그런 단계들을 벗어나 해탈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분노의 단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내 분노에 충실하고, 분노 자체에 충실하고, 분노가 있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운명에 충실하고, 분노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에 찢기는 이와 함께 그 찢어지는 과정을 가는 것이다. 그러한 동행을 통해서 세상의 찢김이 치유된다.
곧 나의 치유와 세상의 치유가 통합되는 과정이며, 명상에 들지 못하는 이와 명상에 들었던 내가 뒤섞이고 유기체적 하나가 되는 과정이 또한 기독교 명상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명상에서 잡념은 단순히 제거 되어야 할 것이 아니며, 그에 해당하는 온전한 근원의 이름을 붙여서 그 잡념의 순간 또한 유일회적인 십자가 같이 영원한 고유성으로 이해되도록 해야 한다.
(이는 과정신학적 이해다. 한편 기독교는 환생과 같은 시간적 개념으로서가 아닌, D-day와 같은 '때'로서 세상을 이해하는 종교다.)
잡념은 잡념대로 명상은 명상대로 그 모든 것이 통합된 영원한 보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오히려 잡념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보다 내가 지금 가장 무시하고 싶어하는 게 무엇인지를 변명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을 영원한 보존 속으로 통합하여 명상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예컨대 명상을 하려고 할 때, '누구에 대한 연민'이 들어온다고 한다면, 처음에는 그것의 근원인 '연민'이라는 단어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연민 보다 더 근원이 있는지 탐색한다. 그것은 십자가로도 증명된 '사랑' 혹은 '생명'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이러한 근원의 단어로 잡념을 연결시켜서, 그것을 무의미한 잡념이라며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원시적인 감각으로 그것을 온전히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온전함으로 회귀시켜 통합하는 과정이 '예배'다.
이 회귀의 과정인 예배와 달리 초월의 명상은 예배가 아닌 예배다. 이는 가장 본질적인 예배다. 그렇기에 예배라고 부를 수 없다. 기독교를 포함한 일반적 명상에서는 보통 이 초월의 명상을 얘기한다.
반면, 그를 향한 명상의 과정으로서, 정신작용에 이뤄지는 과정이 바로 예배다. 이는 온전함으로 회귀하는 예배다. 이 후자의 예배가 명상에 있어 쉬이 비가시화 되어버린다. 그러나 기독교 명상의 독특성은 정신작용에 이뤄지는 후자, 곧 과정으로서의 명상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전자가 예배 아닌 예배로서 초월의 명상이라 부르는 것처럼, 후자는 명상 아닌 명상으로서 회귀의 예배라 부른다.
한편 그런 것들이 예배의 한 형태인 것과 마찬가지로, 예식이 있는 예배 또한 예배의 하나의 형태일 뿐이다. 그것이 예배의 궁극적 형태인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이 마음에서 이뤄지는 회심 역시 예배의 하나의 형태다.

우리는 생활과 따로 떨어진 예배만을 예배로 인식한다. 온전함으로 회귀하는 순간들을 예배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회심의 예배들도 예배 중 하나고, 정해진 시간에 하는 예배도 예배 중 하나일 뿐이다.
물론 회심을 완전히 자발적인 작용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느낌을 쫓는 오류다. 자기 경험이나 느낌만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듯 생활과 분리된 예배의 시간을 일정 속에 주기적으로 정해 놓는 일 역시 중요하다. 식욕이 없는 사람이라고 음식이 필요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예배의 균형은 다르다.
생활과 분리된 예배가 없다면 명상은 가능하겠지만 그것이 기독교 명상이 되기는 어렵다.

앞에서 기독교 명상은 정신작용에 대해 이뤄지는 예배와 함께 독특한 관계 속에 있다고 언급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우울에 있어서도 단순히 우울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우울이 생기는 실존의 현실을 인정하고, 철저한 버려짐이 발생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 '버려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버려짐'이라는 세상만물의 실재를 온전히 하는 것이다. 그 원시 근원으로 회귀하여 지금여기를 깨닫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우울은 너의 우울과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우울은 단순히 개별 극복의 차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울이 없을 수 없음을 마주하고, 함께 그 멍에를 지는 것이다.
바로 그 멍에를 지는 과정까지가 원시적인 '버려짐'으로 온전히 회귀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원시의 작고 따뜻한 바다 웅덩이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그 돌이킴이 예배다. 회심의 예배, 온전함으로 회귀하는 예배다.

두려움에 있어서도 그저 두려움이라는 허상을 깨닫고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기독교의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이라는 마약에 취해야 할 정도로 두려움이 마음의 문제인 게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 실재인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예를 들어, 땀이 피로 보이는 정신 분열이 오히려 실재다. 오히려 그 정신 증상이 진짜 육신이다.
그때 그 정신증상의 육체, 곧 '무너짐'은 내가 아닌 것이 아니다. 그것이 육체나 자아와 같은 나 자체이다. 내가 동시에 무너짐 자체임을 알 때, 드디어 모두가 사실은 무너져 있는 상태임을 아는 것이다. '무너짐'의 실재를 온전히하고, 그 원시 근원으로 회귀하여 지금여기를 깨닫는 것이다.
예배는 바로 이러한 회심의 작업이 이뤄지는 시간이다.

아마도 그렇기에 지금여기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많은 눈물이 나올 것이며, 또한 현실의 삶에 있어서는 버려짐, 무너짐의 현장으로 실제로 삶의 자리를 옮겨가게 되는 것이 기독교 명상의 특징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초월적 명상은 예배가 아닌 예배임을, 곧 본질적 예배임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다만 지금여기의 현존도 넘어서, 자아나 느낌도 넘어서 영원 혹은 무에 닿기 위한 과정으로서, 그러한 본질적 예배를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 명상이다.
온전함으로 회귀하는 예배와 본질적 예배는 구분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명상이라는 본질적 예배도 균형 있게 확보 되어야 한다.


자아를 초월하는 작업인 명상은 온전함으로의 회귀인 예배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온전함으로의 회귀를 진정으로 돕기 위해 영원과의 마주함이 필수적인 것이다.
생활(기도)-회귀(예배)-영원(명상)은 점점 더 높은 수준으로 가는 단계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탄수화물-지방-단백질과 같은 유기체적 관계다.
따라서 생활이 기도가 되려면, 생활과 따로 떨어진 명상이 오히려 필수적인 것이 된다.
마음으로 소원을 비는 기도는, 밥을 먹거나, 음악을 듣거나, 노동을 하거나, 잠을 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생활들이 모두 기도다. 기도는 모든 육체의 작용이긴 하지만, 그것들이 기도임을 알아차리는지와 그렇지 못하는지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모두가 기도임을 알아차리는 힘이 명상에서 온다.
생활(곧 기도)로 명상이 육화되는 것이다. 명상이 우화하는 것이다. 한편 이 우화된 명상인 생활이라는 기도 없이는, 생활과 분리된 예배는 우상숭배가 될 뿐이다.

그러나 명상은 만병통치약 같은 것이 아니다.
어쩌면 명상은 그저 무가 되는 것이기에, 생과의 화해, 세상과의 화해는 명상과는 또 다른 과정이다.
그런데 화해는 애도에서 온다(용서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https://entolre.tistory.com/m/404). 회심에서 명상으로의 스펙트럼이라는 예배가 있는 것과 같이, 회심에서 생활로의 스펙트럼이라는 예배가 있다. 애도는 거기에 있다.
애도는 생활을, 삶을, 죽음과 또는 죽임과 화해하도록 하는 과정이다(삶은 애도 자체다 https://entolre.tistory.com/m/405).
그렇기에 애도는 명상과 별도로 이뤄지되 분리되는 과정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