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시간

자본의 예배 안에서(더함교회 수련회)

사이 (SA-E) 2022. 8. 28. 13:13

8/26

그 나라라는 것이 무슨 자위의 나라 말하는 거 같냐.

어느 태국인은 외국인 수용소에서 죽었다.
갈 곳 없는 홈리스들은 더 깨끗한 환경을 위해 지금도 제거되고 있다.

그 나라 산다고 하면서, 나는 상류층과 비교해서 윤리적으로 산다는 거 말하는 거잖아. 결국.
그렇다면 내가 사는 기준은 여전히 제국의 삶인 거잖아.
저기 저 똥통이 아니라.
그게 바로 자위고, 그게 바로 문란이다.

자신들은 국가자본주의 비판할 수 있으니까 창녀가 아니라고?
피해 당한 여성에 대한 비유를, 아무 문제 의식없이 사용하는 그게 당신들이 자위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게 문란함이다.
국가자본주의 말한다면서, 그 정상성 규정의 피해자가 드디어 중심으로 오게 되는 게 아니라, 여전히 자기 윤리로 환원해 버린다. 그 폭력이 강제 추행이다.

해방을 위해 내가 함께 내몰리는 그 나라는,
당신이 말하는 것과 같은 비교의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의 가장 아픈 곳으로 온 몸이 굽혀져 눈을 맞추고 쓰다듬는 것처럼,

지금 여기,
온 우주로,
저 무능함과 절벽으로
뛰어내린다.
그리하여 온 우주를 굽혀 눈을 맞추도록
함께 손을 잡고 끌어내린다.


8/27

오늘 요한계시록 강해의 결론은 그저 일상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처럼 살라는 거였다.
그 시대 그 땅 피와 살의 설명이 없이 하나님 나라나 외치고 있다.

그거 결국 지금 부자나라 국민인 우리의 모습대로, 제국의 장상성 속에서, 개인의 힐링을 소비하며 살라는 거다.
일상에서 종교인처럼 살라고하면 은혜받고 끝이다.
그렇게 성찬을 한다.

그날의 피와 살이 지금 어디 있는지는 다시 말해지지 못했다.
민족주의의 열망이 더 끔찍한 학살로 마무리 된 실패였다. 제국의 정상성으로 존재가 제거되는 영원한 차별에 놓인 이들은 지금 어디 있나?
성전은 파괴됐고, 유대교 운동을 하던 예수와도 결별해야 했다. 발 디딜 곳 없이 주소도, 원가정도, 국적도 없는 이들은 지금 어디 있나?
완전한 부조리에 지혜마저 무너진 삶에서 묵시를 절규하는 이들은 지금 어디 있나?
자기들끼리의 암호로 얘기해야 할 정도로, 국보법같은 정상성의 살해 안에서 억눌린 이들은 지금 어디 있나?

이렇게 묵시없는 묵시 강해는 대체 무슨 의미인가?
피와 살이 없는 성찬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받는 감동과 일체감은 제국의 난교에 다름없다.
그건 다자연애자의 애뜻함 같은 것이 아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피와 살위에 세워진 백인 교회 공동체, 위계적 권력으로 남의 피와 살로 힐링하는 카니발이다.

이에 나세균 동지 죽으셨을 때 성찬을 나눈 그 예배의 묵시를 대신 나눈다.
https://entolre.tistory.com/m/386

211108 구)노량진수산시장 나세균 열사 추모예배

복잡난해한 현대사회에서 형벌의 형태는 다양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 세상의 생명과 하늘의 생명이 하나로 만납니다. 여기 세상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이 하나로 만납니다. 예식은 무엇인

entolre.tistory.com



8/28

예수를 닮은 상태를 살아가라는 게 설교의 핵심이다.
내용이 있는가?

전쟁 중에 포탄이 떨어진 자리에 만든 수영장을 보여준다.
그 사진을 본 감동을 전한다. 아이들은 어디서나 행복하다고. 행복해 보인다고. 우리도 전쟁 같은 삶에서 그렇게 살고 싶다고.
역겨워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도살 당한 어린양을 말하면서 저항은 사랑, 신실, 거룩 같은 것이라 말한다. doing이 아니라 being이라고도 한다.
이완되고 받아들이는 게, 긴 시간의 저항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긴 시간이란 건 권력의 이분법에서 억눌리는 존재로 연대되는 인생의 시간이 아니다.

삶의 자리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늙을 때까지 성숙해져 가는 지속적인 자위다.
저 사진을 더 밝고 높은 채도로 포샵해서 감동받고 있는 것 같이 말이다.
드디어 성숙한 늙은이는 젊고 생생한 대상을 찾아 자위 도구로 강간하며 성숙하게 자위한다.

만물이 자위 중에 창조됐다. 모든 것이 자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자위하기 위해 창조됐다. 자위는 모든 만물보다 먼저 있었고, 만물은 자위 안에 존속한다. 자위는 교회라는 몸의 머리다.  

당신들은 마스터베이션이 화목을 이룰 것이라고 말한다.
안식. 곧 주일 성수가 필요하다고 한다.
교회는 안식을 배우고, 쉼을 찾아가는 곳이라고 한다. 침묵하라고 한다. 가만히 있으라.
물론 자위는 즐겁다. 인정한다. 죄책감은 우월감으로 처리할 수 있다. 부디 그 화목을 잘 이루길 바란다.
우리 때문에 아직 침몰하는 지구에서 이미 보트에 탈 자리가 있으니, 눈을 가려라. 입을 다물라. 가만히 있으라.

그러니 그런 당신들이 거짓으로 살지 않는다면 각종 공황과 정신적 고통에 빠져있을 것이다.
저주의 말이 아니다. 정상성에서 제거되는 우리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
그마저도 없다면 당신들은 거짓 삶까지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doing의 being을 말하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행동 없는 동물은 없다. 동물행동이 존재다.
나는 서식처를 말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연결 되어 있다. 관계성을 말할 것이다.
아픔이 있는 곳으로 온몸을 굽히는 것, 고통의 자리로 눈을 맞추는 것, 그 쉼이 있다. 절망 앞에서 우린 춤을 춘다. 그렇게 안식을 배우고 쉼을 얻을 것이다.
입이 틀어막힌 이들 옆에서 함께 고함을 지를 때, 그것은 묵음처리 된다. 그 안의 나는 분열되고, 비워짐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닌 우리 존재가 된다. 그렇게 침묵할 것이다.
나는 행복을 말하지 않고 반전평화를 말하겠다. 행복은 감히 내가 말할 것이 아니다. 드디어 당사자가 말하도록, 나도 함께 지워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