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전을 아냐는 것은 흥부전 원전을 아냐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큰 줄거리와 흥부전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얘기할 수 있는, 바로 지금의 사회적 합의를 아는 것이, "흥부전을 안다"는 것이다.
디즈니의 메시지를 아는 것은 단순히 디즈니의 모든 영화를 본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단 한 편의 영화도 전체 관람을 하지 않았더라도, 디즈니의 메시지가 역사 속에서 각 시대를 통해 어떻게 변화해오면서, 어떤 메시지를 주고 받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디즈니의 메시지를 아는 것에 가깝다. 역사적 자료 없이 디즈니의 메시지를 알 수 없다. 어떤 면에선 단순히 영화 자체가 아니라 역사적 자료가 주된 자료에 가깝다.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지금 그것을 보면서 소통되는 것과, 당시 사회와 소통한 내용은 다르기 때문이다.
성경은 단지 정경의 본문을 읽는 것으로는 알 수 없다. 단지 본문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당대의 사회적 합의, 내 삶의 자리에서의 의미를 읽는 것이다. 단지 본문 자체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각 시대를 통해 어떤 메시지로 소통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에 대한 이해이다.
성경이 살아 있고, 읽는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성경 자체가 주체가 되는 것은, 그것이 단지 문자들의 묶음이 아니라, 역사적 소통이기 때문이다. 물질인 성서는 역사적 소통을 통해 성경이 된다. 반대로 역사적 소통이 없는 본문의 읽기는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성서가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성경이다. 그렇기에 외경이나 위경도 성경이 될 수 있다. 세상의 텍스트 없인 성경 없다. 이는 읽는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메시지를 선포하는 성경이 주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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