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페르시아의 왕이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백성들에게 6개월 동안의 잔치를 베풀었으나 여성은 그 백성에 포함되지 않았다. 왕후 와스디는 바로 그 부인들을 위해 잔치를 연다.
왕은 기분에 취하여 미모의 왕비를 구경꺼리로 부르나 와스디는 이를 거절한다.
왕은 분노하여 법대로 측근들과 상의하여 왕후를 폐위하고 온 백성에게 남자들이 집안의 기준이 되는 조서를 내린다.

우리는 여기서 갈등을 겪는다. 페미니즘도 좋지만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 아닌가. 현실적으로 전략을 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다시 물어야 한다. 애초에 차별을 한 건 누구였는가. 고통을 준 것은 외스디가 아니라 아하수에로다. 이 일이 없었다면 여권은 더 보장될 수 있었단 말인가. 이미 여성은 도구였다.

다른 상황으로 가보자. 일제가 우리를 점령했을 때, 탄압을 악화시킬뿐인 독립운동가들을 비난할 것인가.
독재시절, 군대권력만 확고히 만든 학살당한 사람들을 어리석다 손가락질 할 것인가.
예수가 죽었을 때 추종자들은 탄압을 받았다. 차별의 법에 반기를 들 때 탄압을 받게 될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이 현실적인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건 일종의 전략일 뿐이며, 무엇이 어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른다.
정말 중요한 것은 권력의 편 가르기 속에서, 나는 어느 편에 서 있을까의 문제다.
권력은 유지를 위해 편을 가른다. 가만히 있을 때, 뒤에서 평가하고 있을 때, 언제나 지금 여기서 피해 받지 않는 편에 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 서 있으면서도 탄압받지 않는 자리는 없다.

성경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이를 두고 하나님이 다음 왕비를 세우는 계획으로 읽는다. 슬그머니 부패한 왕과 권력을 평가하는 자리로 옮겨간다.
그러나 여기 바로 피흘리는 탄압의 자리가 있다. 그 안에서 함께 소리를 지른다.
예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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