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적을 일으킨 설화는 모든 문화권에서 흔히 나타난다. 주술이 인정되는 문화권에서는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의 주인공에게 대중적 지지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황건의 장각이나 활빈의 홍길동 등 그 예를 찾는 건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는 예수가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니라거나 다른 이들도 기적을 행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설화가 붙는 다는 것은, 정도를 벗어난 세상에서 약탈을 당하는 이들의 편에서 인간을 회복하는 일을 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곧 기적을 행한 것이 그를 옳게 한 것이 아니다. 그가 옳기에 기적에 대한 말들도 붙을 수 있다. 선후 관계를 혼동한다. 기적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다. 그가 옳기 때문에 옳은 것이며, 우리가 따를 것은 옳은 일이다.
2.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구약의 성경 구절들을 갖다 붙이는 듯한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예를들어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의 뜻이 이뤄지기 위해 갑자기 새끼 나귀를 '한 번' 타는 얘기가 복음서에 기록된다. 기적에 대한 '강조'는 이런 '갖다 붙이는 듯한' 맥락에서 다뤄져야 한다. 이는 실제로 갖다 붙인 것이라고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갖다 붙이는 듯한 구조가 있다고 하여 신성을 의심할 것이 아니며 그런 구조로 인해 사실 자체를 왜곡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어떤 기적을 행한 것이 없었어도 그는 하나님이다. 다만 유대교의 전통에 맞춰 메시아를 설명해야 한다면?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추듯 제한된 표현 밖에 할 수 없다. '제한'인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예수가 아닌 기적이라는 우상을 예수로 대치할 수 있다. 기적으로 제한할 필요가 없다. 기적이 없었어도 그는 하나님이드. 정말 중요한 것이, 그가 오는 시대에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오는 것이 하나님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2.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구약의 성경 구절들을 갖다 붙이는 듯한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예를들어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의 뜻이 이뤄지기 위해 갑자기 새끼 나귀를 '한 번' 타는 얘기가 복음서에 기록된다. 기적에 대한 '강조'는 이런 '갖다 붙이는 듯한' 맥락에서 다뤄져야 한다. 이는 실제로 갖다 붙인 것이라고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갖다 붙이는 듯한 구조가 있다고 하여 신성을 의심할 것이 아니며 그런 구조로 인해 사실 자체를 왜곡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어떤 기적을 행한 것이 없었어도 그는 하나님이다. 다만 유대교의 전통에 맞춰 메시아를 설명해야 한다면?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추듯 제한된 표현 밖에 할 수 없다. '제한'인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예수가 아닌 기적이라는 우상을 예수로 대치할 수 있다. 기적으로 제한할 필요가 없다. 기적이 없었어도 그는 하나님이드. 정말 중요한 것이, 그가 오는 시대에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오는 것이 하나님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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