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왜 애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왜 세포들의 모임과 이어져 형성되는 하나의 자아는 있는데, 만물들의 모임과 이어져 형성되는 하나의 신은 없다고 생각하는가.
왜 모든 애도를 내가 만든 애도의 기준으로 애도인지 아닌지를 판결하는가.

사슴의 목을 물어 뜯는 사자는 애도하지 않는가.
자본주의 착취로 구성된 부자나라의 우리는 애도하지 않는가.

타자의 고통과 죽음이 나와 융합되는 곳에서는 세상의 애도가 있고 거기엔 생명이 있다.
자아와 분리되고 타자화 되는 곳에서는 아무리 내 느낌의 애도가 있어봤자 더 큰 부패만이 이어진다.

기억하는 것, 투쟁하는 것은 애도의 과정일 수 있으나 애도 자체는 아니다.
애도에는 상실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차원이 있다면, 만물과 함께 하는 신적 차원이 있다.

세포가 자아의 슬픔을 느끼지 못하듯이, 우리는 신의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의 고통에 대한 자아의 슬픔이 온 몸과 일상을 거기에 맞추도록 하는 것처럼,
동물 한 명, 식물 한 명에 대한 신의 슬픔이 온 세상을 거기에 맞추도록 한다.

슬픔과 기억이 애도의 일부인 것처럼, 먹는 것도 노동하는 것도 잠을 자고 사랑을 하는 것도 그 죽음과 분리되지 않는 애도의 과정이다.
이때 개인의 애도와 신의 애도는 함께 한다.
그런 애도는 내가 연결된 죽음이 타자의 고통과 죽음에 공감하게 하고, 타자를 살림으로써 나에게 연결된 죽음이 나와 함께 다시 생명을 입도록 한다.
끊임 없는 죽임의 과정과 살림의 과정이 하나가 된다.
자아의 생명과 자아 바깥의 생명은 공동의 운명체가 된다.

살아 있지만 삶이 부정당하는 부패가 있다.
예를 들어 차별 속에서 육체적으로 존재적으로 감옥 속에 있는 난민들이 있다.
이 죽임에 대한 증인이 되고, 그 옆에 서고, 증언을 하는 것 이 또한 애도의 과정이다.
누군가의 죽음마저 나의 소유로 가둬두는 것이 아니라, 신적 합일로 다시 생명을 입도록 한다면,
이러한 타자에 대한 죽임의 자리로 내 삶의 자리가 옮겨지고, 죽임의 자리에서 다시 생명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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