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처럼 치유의 기적도 보이고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1.
능력의 차이를 보며 혹시 내 신앙이 잘 못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며,  혹은 그 능력을 바라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힘을 섬기는 일이다. 보잘 것 없는 내 선행과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은 위아래 없이 동일한 권능이며 동일한 영향력을 미친다.
진정한 만민을 위한 기독교의 시작은 사람 살린 베드로가 아니라 이름도 모르게 이방으로 간 제자들 덕분이었다.
내가 미치는 영향력을 볼 때 우리는 누구의 힘이 크거나 작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면 그 차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안다. 능력은 가장 필요한 곳에 가장 필요한 만큼 완전하게 이루셨다.
내가 어떤 능력이 없어서 주님과 멀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과 멀어져 있어서 능력을 보게 되는 것이다.

2.
나는 능력을 먼저 보고 있었는가, 살아난 사람을 먼저 기뻐하고 있었는가. 능력을 봤다면 나는 죄책감이나 무력감에 빠져든다. 그래서 회개하려고 한다. 그 속을 살펴보면 결국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서다. 남을 위하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하게 된다.
반면에 살아난 사람을 먼저 보는 사람은, 그저 기뻐하고 감사하고 용기를 얻는다. 그는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능력을 비교하지 않는다. 주님이 높낮이를 두시겠는가. 능력의 차이는 없다. 작은 열쇠구멍으로 크고 화려한 열쇠가 들어가진 않는다. 보내시는 곳에 가장 적당한 능력만이 있다. 일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성령님이 하신다.
사람을 회복시키는 기쁜 소식은, 내가 먼저 제자된 삶을 살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내가 어떤 능력을 얻을 수 있는지를, 혹은 선한 영향력이란 이름으로 내가 미치는 영향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명하신대로 살아가고 있는지의 눈으로 돌이키게 한다.

3.
가난이 없어지고 차이가 없어지는 것은, 그를 더 가지게 해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그와 동등해질 때에만 가능하다. 애초에 내가 더 가지게 됐었던 일 자체가 환술이다. 결국 베드로 역시 병이 있는 사람들보다 못한 삶과 죽음으로 내려갔다.
환술에 걸린 사람들은 내 기준으로 내 방식으로 내 신앙생활이 깊어지길 원한다. 일단 내것을 먼저 챙겼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회복의 복음을 보고는 나의 선한 계획을 짠다. 경건과 능력도 소유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
회복의 복음을 보는 사람은 그 반대다. 오히려 내가 쥔 것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내 손에 쥔 돈, 정의, 경건을 모두 내려놓는다. 내가 억지로 의지를 내지 않는다. 억울한 이들의 눈물이 닦여지는 것을 보며, 환술에 가려져 내가 쥐고 있던 것을 보지 못했던 눈이 닦여지는 것이다. 내려놓을 수록 물리적으로 그 자리로 가고, 그 자리로 갈수록 더 내려놓을 수 있게 되는 풍성함에 이른다.
부족한 나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죄책감이 아니라 기쁨이 작용한다. 오히려 이미 나는 나 자체로 완전히 온전한 것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내가 쥔 것이 버려지며, 사람들은 거기에서 내가 아니라 주님을 보게된다.

4.
전도가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선이다. 하나님의 공평이 있고, 그에 의해 치유가 있고, 그래서 복음이 전파된다.
내가 전도를 해서 그가 사는 것이 아니다. 그건 내가 시혜를 배푸는 시선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평에 의해 응당 나눠야 하는 능력들을 나누는 것일 뿐이다.
이 나누는 행위는 내가 아니라 받는 사람의 언어로 이뤄져야 한다. 잘못된 선교에서 보여지듯, 해당 지역에서 그들의 문화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문화로 얘기하지 않고, 복음만 선포하면 다 이뤄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건 오히려 잘못된 미신 전파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미신 전파도 이용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 미신 전파를 통해 전해지는 분이 아니시다.
선교에서처럼 전도도 마찬가다. 성령님이 내려오실 때 제일 처음 한 일은 그 사람의 언어로 얘기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인생만큼 한 평생을 함께 살지 않아, 그의 언어를 알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도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내가 전하는 주체가 되어서 성령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체가 되어서 성령을 구하는 것이다. 대뜸 먼저 예수믿으라고 하는 게 아니다. 먼저 그라는 세상에 충분히 경이로움을 느끼고, 그의 세상으로 포함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부족한 부분은 성령님이 채워주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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