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의 치유 이적처럼 사울의 전환 역시 교회를 세우는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동일한 핍박을 받는다.
곧 내가 가진 능력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능력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현실로부터 미움받는 일을 통해 내가 걸어가는 길이 증명된다.
현실을 극복할 수 없더라도 변화는 있었다.
그런데 현실과의 새로운 공존이 그러한 변화를 살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웰빙이나 녹색과 같이 자본권력은 그나마의 대안을 와전시켜 포섭해버린다.
공존은 대안적인 세상에서나 가능하지, 자본권력 세상 안에서는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현실과의 공존이란 그나마 극복한 현실에 대한 포기나 다름없다.
그나마 공존할 수 있는 것은 공존을 선택한 나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어디선가 극복하고 있는 노력이 나에게도 힘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다 할 수는 없다. 내가 멈췄다면 내가 옳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걸어가고 있는 그들을 지원하라.
그들을 지원하는 이유는 나는 못가기 때문이 아니라 나도 다시 걷기 위해서다.
현실과의 공존은 언제나 내가 못갈 것이라고 설득한다. 그러니 이제 그만 웰빙 라이프를 누리라고 한다.
그러나 진짜 세상에선 난 다시 걸을 수 있으며, 나 자체가 진짜 웰빙이 된다. 현실의 전략까지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다.
곧 내가 가진 능력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능력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현실로부터 미움받는 일을 통해 내가 걸어가는 길이 증명된다.
현실을 극복할 수 없더라도 변화는 있었다.
그런데 현실과의 새로운 공존이 그러한 변화를 살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웰빙이나 녹색과 같이 자본권력은 그나마의 대안을 와전시켜 포섭해버린다.
공존은 대안적인 세상에서나 가능하지, 자본권력 세상 안에서는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현실과의 공존이란 그나마 극복한 현실에 대한 포기나 다름없다.
그나마 공존할 수 있는 것은 공존을 선택한 나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어디선가 극복하고 있는 노력이 나에게도 힘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다 할 수는 없다. 내가 멈췄다면 내가 옳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걸어가고 있는 그들을 지원하라.
그들을 지원하는 이유는 나는 못가기 때문이 아니라 나도 다시 걷기 위해서다.
현실과의 공존은 언제나 내가 못갈 것이라고 설득한다. 그러니 이제 그만 웰빙 라이프를 누리라고 한다.
그러나 진짜 세상에선 난 다시 걸을 수 있으며, 나 자체가 진짜 웰빙이 된다. 현실의 전략까지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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