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 대해 너무 환원주의적이기만 시선이다.
'나'는 관계 속에 있는 고유성이기도 하다.
나의 중심이 소외당한 곳으로 옮겨지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공적 영향력과 개인적 획득의 영역도 점점 줄어든다.
'공적 영역'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본권력에 부합하는 영역이며, 다른 하나는 정의, 혹은 자비, 혹은 위대한 영혼에게 부합하는 영역이다.
위에서 말한 공적 영향력이 줄어든다고 한 말은 전자의 공적 영역을 뜻한다. 오히려 그런 공적 영역의 감소는 후자의 공적 영역의 확장을 얘기할 수도 있다.
난 2017년보다 2018년에 더 쉽게 분노하고 정신을 놓치게 되었다.
자본권력에 부합하는 셀프리더십은 단지 개인의 상태로만 환원시킨다.
그러나 2018년에 난 난민문제, 각종 혐오문제에 나라는 중심을 더 깊게 이동시켰다. 그곳에선 누구나 더 분노하고 정신을 놓치게 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의 '자신'을 보는 것이 정의에 부합하는 셀프리더십이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 집단에서 말해지는 '중심'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그 집단에서 어떤 스토리들이 발화되는 지에 따라 그 집단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지본권력에 더 가까운 모습인지, 정의에 더 가까운 모습인지가 감춰지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관계 속에 있는 고유성이기도 하다.
나의 중심이 소외당한 곳으로 옮겨지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공적 영향력과 개인적 획득의 영역도 점점 줄어든다.
'공적 영역'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본권력에 부합하는 영역이며, 다른 하나는 정의, 혹은 자비, 혹은 위대한 영혼에게 부합하는 영역이다.
위에서 말한 공적 영향력이 줄어든다고 한 말은 전자의 공적 영역을 뜻한다. 오히려 그런 공적 영역의 감소는 후자의 공적 영역의 확장을 얘기할 수도 있다.
난 2017년보다 2018년에 더 쉽게 분노하고 정신을 놓치게 되었다.
자본권력에 부합하는 셀프리더십은 단지 개인의 상태로만 환원시킨다.
그러나 2018년에 난 난민문제, 각종 혐오문제에 나라는 중심을 더 깊게 이동시켰다. 그곳에선 누구나 더 분노하고 정신을 놓치게 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의 '자신'을 보는 것이 정의에 부합하는 셀프리더십이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 집단에서 말해지는 '중심'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그 집단에서 어떤 스토리들이 발화되는 지에 따라 그 집단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지본권력에 더 가까운 모습인지, 정의에 더 가까운 모습인지가 감춰지지 않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