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유한하다.
기독교를 기독교로 만드는 독특함은 바로 그 신의 유한성이다.
신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다만 인간의 제한 속에서만, 곧 3차원에서 밖에 가능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3차원인 우리는 끝없는 창조를,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한을 통해서 만난다.
수소 둘과 산소 하나가 만나면 전혀 새로운 존재인 물이 나타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었고, 그 전에는 절대 존재할 수 없던 것이 나타난다. 우리의 한 포옹이, 전혀 새로운 우주를, 새로운 빅뱅으로 우주를 창조한다.
물이 되어도 수소와 산소는 그대로 존재하듯, 신 또한 모든 곳에, 모든 시간에, 모든 탄생에, 그 모든 우주에서, 완전하다. 그러나 인간은 다만 물만을 만질 수 있는 것처럼, 그저 시간과 땅을 따라 함께 걸어주고 있는 자비만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존재에 경탄하는 것은 신으로 부터 온다. 우리의 시공 안에서, 새로운 만남의 모든 첫 출산에게 모든 것으로 사랑한다. 그렇게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신은 별의 역사 안으로, 곧 제한된 존재의 그 제한 안으로 함께 제한되는 신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았으면 구원이 없었을까?
인간 노화로서의 죽음이라도 너무나 충분한 제사였을 것이다.
기독교의 신관이 드러나는 독특한 지점은, 인간에게 인간으로 왔다는 것에 있다.
유한성으로 들어와서 함께 먹고, 울고, 사랑한다.
그 모든 아픔과 고통과 두려움을 함께 한다.
그 모든 첫 발견들을, 첫 걸음을, 첫키스를 놀라 기뻐한다.
예수가 신이라는 것, 그것은 신이 완전한 무지로 연대한다는 것이다. 드디어 완전한 사랑의 앎으로 연대한다는 것이다.
그 신처럼,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잘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거기에 너가 있고, 우리가 만나고, 포옹하고, 발견해 간다.
신도 모를 우주가 태어난다. 그리고 자비가 영원하다.
그런 신을 믿는 다는 건 앎과 행함과 공부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를 낳기 전에 육아공부는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히 공부하더라도 아이를 만나 키우면서 완전히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와 같다. 공부와 행함과 앎은 만남을 통해 언제나 함께 탄생한다.
그래서 예수가 만났던 이들은 언제나 타자화되고 물화 되어버린 존재들이었다.
가난한 자들. 소수자들. 사회적 약자들. 제한되어지는 그 존재와 연대하고, 그 제한 속으로 하나 되는 곳에서 함께 마시고, 웃고, 울었다.
그러니 어찌 예수처럼 만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 자체가 십자가다. 곧 제한이다. 죽음이다.
약자와 연대하여 그 제한으로, 바로 그 죽음으로 함께 스며들어 가는 삶.
그래서 그 만남을 통해 드디어 생명이 우주로 창조되는 삶.
그것이 기독교의 비밀이다.
기독교를 기독교로 만드는 독특함은 바로 그 신의 유한성이다.
신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다만 인간의 제한 속에서만, 곧 3차원에서 밖에 가능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3차원인 우리는 끝없는 창조를,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한을 통해서 만난다.
수소 둘과 산소 하나가 만나면 전혀 새로운 존재인 물이 나타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었고, 그 전에는 절대 존재할 수 없던 것이 나타난다. 우리의 한 포옹이, 전혀 새로운 우주를, 새로운 빅뱅으로 우주를 창조한다.
물이 되어도 수소와 산소는 그대로 존재하듯, 신 또한 모든 곳에, 모든 시간에, 모든 탄생에, 그 모든 우주에서, 완전하다. 그러나 인간은 다만 물만을 만질 수 있는 것처럼, 그저 시간과 땅을 따라 함께 걸어주고 있는 자비만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존재에 경탄하는 것은 신으로 부터 온다. 우리의 시공 안에서, 새로운 만남의 모든 첫 출산에게 모든 것으로 사랑한다. 그렇게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신은 별의 역사 안으로, 곧 제한된 존재의 그 제한 안으로 함께 제한되는 신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았으면 구원이 없었을까?
인간 노화로서의 죽음이라도 너무나 충분한 제사였을 것이다.
기독교의 신관이 드러나는 독특한 지점은, 인간에게 인간으로 왔다는 것에 있다.
유한성으로 들어와서 함께 먹고, 울고, 사랑한다.
그 모든 아픔과 고통과 두려움을 함께 한다.
그 모든 첫 발견들을, 첫 걸음을, 첫키스를 놀라 기뻐한다.
예수가 신이라는 것, 그것은 신이 완전한 무지로 연대한다는 것이다. 드디어 완전한 사랑의 앎으로 연대한다는 것이다.
그 신처럼,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잘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거기에 너가 있고, 우리가 만나고, 포옹하고, 발견해 간다.
신도 모를 우주가 태어난다. 그리고 자비가 영원하다.
그런 신을 믿는 다는 건 앎과 행함과 공부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를 낳기 전에 육아공부는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히 공부하더라도 아이를 만나 키우면서 완전히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와 같다. 공부와 행함과 앎은 만남을 통해 언제나 함께 탄생한다.
그래서 예수가 만났던 이들은 언제나 타자화되고 물화 되어버린 존재들이었다.
가난한 자들. 소수자들. 사회적 약자들. 제한되어지는 그 존재와 연대하고, 그 제한 속으로 하나 되는 곳에서 함께 마시고, 웃고, 울었다.
그러니 어찌 예수처럼 만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 자체가 십자가다. 곧 제한이다. 죽음이다.
약자와 연대하여 그 제한으로, 바로 그 죽음으로 함께 스며들어 가는 삶.
그래서 그 만남을 통해 드디어 생명이 우주로 창조되는 삶.
그것이 기독교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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