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모르는 이상에 젖어 가족을 버린 형이 싫었던 동생은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다. 형이 미웠다.
그러나 그 형이 더러운 권력 폭력 앞에 시체가 되었을 때, 온 가족이 그리고 그 자신이 변할 수 밖에 없었다.
야고보를 통해 예수는 세상에 다시 살아 났다.
무언가 세상을 전복할 수 있을 지 알았다. 그러나 총칼 앞에 무력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소중한 그 사람이 총칼에 죽었다. 이제는 그 죽음에 연대하여 불길은 거세졌다.
사람들이 외쳤다. 여기 예수가 살아 있다고.
예수가 신이라면,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도 세상에 개입하고 있다면,
예수라는 실체는 더이상 우리와 상관없지 않게 된다.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예수의 시신은 없다. 그리고 그 부활은 새로운 존재가 된 사람들을 통해 증명되었다.
여기 시신도 없는 억울한 죽음이 있다.
그들이 부활한 내세는 따로 분리되지 않고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함께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그 내세를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변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정말 만난 사람이라면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이 지금도 개입한다면, 그리고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더이상 동화 속 얘기가 아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열차 화장실에서 어린 미혼모를 통해 예수가 태어난다.
공장식 축산 강간을 통해 예수가 태어난다.
변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정말 만난 사람이라면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도 지금 여기 탄생하고 부활한다.
증인들을 통해 부활이 확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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