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않아도 되는 권력 사이이서
느끼는 존재는 자살에 가까워진다.
난 자살 자체에 그다지 거부감이 없다.
더 큰 죽음을 가리는 폭력에 거부감이 없는 사회의 기본값보다 그것이 더 건강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수많은 자살에서 그저 자기 자신을 죽인다.
어떤 신념을 위한 죽음도 마찬가지. 고작 자기 이상으로 자신을 가둬서 죽이는 경우가 대부분일 터이다.
나는 자살자들이 자살 안에 있는 우주적 막내림의 소통을 알았으면 좋겠다.
철저한 외톨이더라도 태고부터 이어진 관계성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우주적 세계를 닫아낸다.
태초가 당신 손에서 눈을 감는다. 그래. 죽어도 된다.
죽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죽어도 된다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나는 자살을 막는 신학이 아니라, 자살의 우주성을 되돌려 주는 신학을 할 것이다.
자살이 심각한 고통임을 완전히 모르지 않는다. 나 역시 자살 때문에 폐쇄병동에 간 적이 있으니까.
오히려 자살의 우주성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그건 뭔가 의미를 부여해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고통의 우주적 실재를 공동적으로 알아차리는 과정이다.
자살에 대한 대부분의 기도는 자살 마저 죽인다. 그 철저한 비존재화는 죽음 이전의 부패다.
자살은 연민 정도만 받아야 하는 게 아니다.
그거 받는 건 당연한 거고, 더욱 거대한 것을 받아야 할 자격이 있는 거다.
오히려 자살을 위한 기도.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간다.
'고요한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조설화에서 성별 문제 (0) | 2020.09.11 |
---|---|
추천 성서해석판 (0) | 2020.09.09 |
예수는 해석이다 (0) | 2020.06.22 |
신학함이란 (0) | 2020.06.22 |
기독교를 존경하는 일 (0) | 2020.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