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회는 모두가 쉽게 자기 자리에서 옳고 그름을 가려내어 말한다(3:1). 예컨대 박탈해도 되어서 박탈당한 장애인의 이동권과 위협당하는 안전에 대한 저항을 위해 버스 아래로 뛰어든 장애인에게, 그런 식으로 하면 불법이며 동정해 줄 수 없다는 식으로 가르친다. 판결하고 가르치려 드는 이들은 누구인가? 맨스플레인이라는 말이 있기도 하고, 혐오에 대해 설명하는 《말이 칼이 될 때》라는 책도 있다. 현대 사회에서 누군가의 혀가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3:5), 그가 위계적 권력을 가졌을 때 가능하다. 젠더, 국적, 인종 혹은 종, 정상성 규정 등 소수자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위계가, 타자화 되어 비가시화 된 억눌림을 무시한 채 자기가 안전한 위치에서 판단하고 가르치려 들 수 있게 된다.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없는가? 타자화 된 2등 인간의 혀는 길들일 수 있다. 비인간 동물이 길들여 질 수 있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억누름에 반대하는 저항에 대해 죽이고, 결박하고, 감금하면 된다(3:2,7). 아니, 존재만으로도 흑인은 백인의 무릎에 깔려 죽임을 당한다. 인간 노예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소수자들, 정상성 규정 밖에 있는 이들 역시 누군가는 소리를 지른다. 그런 그는 정상성의 가르치는 혀 안에서 죽임당하고, 결박당하고, 감금당한다. 바로 그렇게 함부로 휘둘러도 되는 권력, 그렇게 휘두르고 있으면서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권력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이다(3:8).
욕설을 하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쉽게 기계적 평등을 말한다. 그것 자체가 저주의 말이나 다름없다(3:10). 위계적 이분법에 의해 억눌리는 그 억눌림, 타자화의 차별이 그런 기계적 평등에 의해 안전하게 보장된다. 비인간동물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길들인다는 것은 어린왕자에 나온 것과 같은 서로에 대한 관계적 길들임이어야 한다. 그러나 위계는 억누르고 위력으로 지배한 것에 길들임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그런 기계적 적용을 따르면서, 비가시화 시킨 착취 위에서 힘을 가진 자들만의 평화를 누린다. 바로 그것이 저주고 죽음이다. 이는 희생되는 이들의 죽음이기도 하지만, 그 위계가 허용되는 구조 안에서 지구가 실제로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차별주의와 타자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어서 고민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 권력을 누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자리에서 선행하고, 불쌍한 존재들을 시혜적으로 돕는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결국에는 자기 안전한 곳에서 자기만 확장하는 것이고, 그 권력을 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차별과 타자화의 문제를 극복하지 않는고 가만히 있으면 그 자체로 차별과 타자화가 보장되고 강화된다. 그렇게 가진 자들의 평화 속에서 보이지 않는 착취를 누리며, 자신의 선함을 누린다. 선한 것도 그렇게 죽음에 기여한다. 그렇게 평화는 절대 타자화를 간과한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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