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과 부자 사이에 대우를 달리하지 않는 것이 악이라고 배우는 사회를 살고 있다. 경제세계화 사회에서 우리가 편히 살 수 있는 것은 국내의 혹은 국외의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착취의 구조를 발전시켜 주면서 거기에 개발이다, 진보다, 낙수효과다 이름 붙인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을 노예들로 취급하며 양극화의 발 밑, 그저 거기에 있으라는 말이다(2:3). 우리는 정말 부자들을 신으로 섬기지 않고 있는가? 건물주가 꿈인 사회는 건물주가 취할 수 있는 이득을 정당화해서 건물주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줄어드는 사회다. 건물주들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월세는 결국 소비자의 돈, 곧 서민들의 돈이다(2:6). 그럼에도 사람들은 부동산이니, 주식이니, 재테크니 한다. 그건 결국 경제 세계화를 통해 부자 나라 한국에 양극화로 들어온 가난한 이들의 돈이다. 바로 그런 부를 신으로 섬기고 있다(2:3). 한국인처럼 살려면 지구가 3.7개 필요하다고 한다. 이미 한국의 빈민 정도의 수준도 세계의 고혈을 빨아먹고 있다. 이런 구조에서 특별히 무언가 하지 않는 것 자체가 거기에 가담하는 것이다(2:4, 9). 작년엔 비닐하우스에서 이주노동자가 얼어 죽었다. 다양한 죽음과 상해가 한국에서도 이뤄지는데, 경제세계화 속에서 착취당하는 곳에서는 어떤가.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서 거기에 가담하고 있다(2:11). 우리가 그런 죽음의 역겨운 존재가 되어 있음에도 괜찮은 것이 이미 우리 죄에 대한 심판인지 모르겠다(2:13).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 아니다. 한국 GDP에서 착취하는 지구의 수인 3.7로 나눠서 더 이상 착취가 아닌 정도의 수준의 월 소득을 계산하면 90만원이 되지 않는다. 90이 넘는 모든 소득을 가난한 이들에게 되돌려 주는 게 선함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악함이다. 돌려주고 나서, 90만원 안되는 소득 수준 내에서 함께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정의다. 그게 어느 정도의 삶의 생활수준인지 알 것이다. 바로 그 삶이 자비다(2:13). 그러한 삶의 자리에서는 다른 풍경이 보인다. 다른 관계를 맺는다. 그것이 죽음의 역겨운 존재에서 벗어나는 길이다(2:13). 반대로 말하면 그 삶의 자리가 아니라면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 있다.

 

그것은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위계적 이분법에 의해 억눌리고, 내몰리고, 죽임 당하고 있는 모든 존재들과 함께 우리로 회복되는 그 힘이, 자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끈다. 육식이 채식보다 10배의 땅과 물, 화석연료를 쓰는데도 싼 것은, 가난한 이들이 살던 숲에 불을 지르고, 그들의 입에 들어갈 채소까지 빼앗아, 그들을 노예노동으로 부려서 사료작물을 기르기 때문이다. 단순히 입에 들어온 고기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그 억눌리는 이들이 모두 고기다. 국산 채소 역시 이주 노동자의 착취를 통해 온다. 식물을 먹어도 그 고기를 먹고 있는 것이다. 내 온 몸은 그 착취를 통해 구성되어 있다. 결국 그런 약육강식을 섬기는가, 하나 된 생명의 유기체적 연결망을 섬기는가의 문제다. 그런 문제다. 만약 유기체적 하나를 섬기는 이라면, 그는 동물의 권리 있기에 동물 중 하나인 인간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바로 그 연결성을 회복해가는 것이, 모든 존재들과 함께 우리로 회복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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