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례전의 낮아진 신을 믿는 종교이기에,
가장 연약한 종교라는 정체성을 갖는다.

유대교에 감사한다.
이는 가부장제 아버지에게도 감사함이 있는 것과 같다.
유대교를 함께 지키고, 유대교 근원의 신을 섬긴다.
가장 연약한 구원이다.

불교에 감사한다.
서구는 동양종교를 통해 이분법과 권력의 철학을 반성했다.
불교를 함께 지키고, 불교 근원의 신을 섬긴다.
가장 연약한 구원이다.

무신론에 감사한다.
종교는 두려움에 대한 회피와 변명임을, 그리고 자본주의도 일종의 종교임을 알게 한다.
무신론이 건강하도록 함께 지키고, 무신론 근원의 신을 섬긴다.
가장 연약한 구원이다.

연약하다는 것은 약하다는 것은 아니다.
연약함을 외면하면 자기자신을 권력이나 욕망으로 대체할 수 밖에 없다.
연약하다는 것은 모든 존재가 사실 약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며, 연결성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곧 구원 받기 위해 가장 연약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다.
연약한 종교라면 연약한 기도가 몸으로도, 관계로도 드러날 뿐이다.
그 기도가 있는 곳에 구원이 임할 뿐이다.
‘기독’이란 외국어는 구원을 뜻한다. 그 연약함의 구원을 믿는 것이다.

이때 교회의 의미는 신앙의 모임이다.
연약함으로 가는 일을 혼자 할 수 있다는 것은 능력주의의 가부장적 사고다.
인간은 애초에 옆에서 지켜주지 않는다면 연약함을 견딜 수 없는 존재다.

교회 안에 가장 연약한 신앙이 없을 때,
그것은 단지 종교 세력으로서 이름 붙인 기독교일 뿐이다.
굳이 세력으로서의 이름이 연약함보다 중요하진 않다.
그저 가장 연약한 신앙으로 돌이켜 돌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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