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밤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있는 게,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지만 어찌보면 이런 것도 호강이다. 안전한 곳에서 편하게 누워서 내일 먹을 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만큼 더 존재가 버거울 때가 있다. 잠들지 못하는 밤.
숨만 가빠지고, 각성 상태가 된다. 나는 얼마나 쓸모없고 얼마나 기만적인가.
이럴 때는 세상의 고통을 기억하려 해보지만, 나는 더 형편 없을 뿐이다.
삶은 기만이고, 고통이 진실이다.
몸과 정신이 서로를 갉아먹는다. 그런 밤이다. 관성으로 찾아오는.
그럴 때 다시 또 다시, 노동하듯 세상의 고통을 기억한다.
기만 없는 삶은 불가능하다. 혼자 그 무엇도 책임질 수 없음을 받아들인다.
슬퍼해야겠다. 할 수 있는 것은 애도다.
고통으로만 이뤄졌다. 세상은. 모든 살과 피와 안락도.
안식은 안락이 아니다. 안식은 오히려 부조리다.
존재는 불안이고 고통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좋다고 말해야 하니, 슬퍼할 겨를이 없다.
그때 안식은 잠깐 멈춰 그 부조리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것이다.
기만인지 알지만, 좋다고 믿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제거되는 세상의 고통이 있다.
긍정은 기만일 뿐, 사실 고통이었음을 기억하고 함께 애도할 수 있을 때,
오히려 그 기만은 점점 더 힘을 잃고, 우리는 점점 더 함께 슬프고 고통스러울 수 있게 된다.
슬퍼할 수 있어 슬프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모두가 고통스러울 수 있어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안식은 그런 식으로 슬픔과 고통이 없는 곳=완전히 하는 곳에서 온다.
그래서 안식은 안락이 아니다.
안식은 오히려 부조리의 고통과 슬픔의 증거이다.
좋다고 덮어놓는다고 해결될 수 없는 고통과 기만이 있다. 그것들이 제거되지 않고 중첩되게 하는 노동의 과정, 그것이 안식이다.
안식은 실재하는 고통이 없는 것으로 취급되지 않는 자리를 만들고, 그래서 기만이 힘을 잃는 자리를 만드는 노동의 과정이다.
그래서 안식은 나의 것이 아니고 세상의 것이다. 안식은 내 마음의 평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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