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18장과 20장의 내용은 매우 유사해서, 18장은 성관계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으나 자기 아이를 몰렉에게 제물로 바치는 행위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20장은 처음에 몰렉에게 아이를 바치는 내용을 배치하고 강조하긴 했지만, 이후에는 성관계에 관한 율법을 주로 다룹니다. 여기서 성관계에 대한 내용으로는 근친상간과 관련된 다양한 사례들, 간통에 해당하는 것들, 남자 간 성관계, 수간 등이 언급됩니다.


이 중 남자 간 성관계에 대한 구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여자와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안 된다. 그것은 망측한 짓이다. (레 18:22)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이므로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죄값으로 죽는 것이다. (레 20:13)


인권을 지지하는 진영에서 종종 성경을 자기본위로 해석할 경우가 있습니다. 

위의 구절이 "남성 간 성관계를 말하지 여성 간 성관계는 말하지 않으므로 동성애는 아닐 것이다"라는 주장 등이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시대적 정황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쓰여진 고대 중동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나타난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양한 남성우월주의 사회 안에서, 여성 간의 성관계는 존재하지도 않거나 매우 천한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남성 간의 성관계는 이성애보다도 오히려 더 정신적인 것이며, 우월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남색이라는 단어 자체가 남성 중심적 단어입니다. 남색이란 것이 남자간의 성관계를 말하지만, 여색이란 것이 여성간의 성관계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철저히 남성만을 주체로 보고 있습니다. 여성에 대해서는 성관계를 언급할 수 없었습니다. 성관계는 남자가 하는 것으로 여성은 주체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하게 말해 여성 간 성관계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 시대에서는 성관계는 남자가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을 고려했을 때 남성을 주체로 언급한 일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그 사회에서는 남성의 동성 간 성관계를 기술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성의 동성애는 다룬 것이 아니니 비논리적이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동성애가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위 성경 구절에서 동성 간 성관계는 망측한 짓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성애는 성지향으로서의 동성애 기질 자체를 정죄할 수는 없다. 다만 동성 간 성관계는 망측한 것이니 참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남성 동성애자가 항문성교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동성 간 성관계와 동성애가 동일한 개념인 것도 아닙니다. 또한 동성애로 분류하기 애매한 경우도 있습니다. 간성의 경우 무엇이 동성애가 되는 것입니까? 이 모든 상황에서 성관계를 참으면 완벽하게 정리되는 것입니까? 

사실에 부합하는 해석이 필요합니다. 천동설의 시대에도 지동설의 증거들이 사실을 이끌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본문 앞에서, 우리는 당시 세계관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을 동시에 마주하고 있습니다. 사실에 부합하는 해석을 찾아가는 작업에 대해, 동성애자들을 옹호하기 위해 성경을 자기본위로 해석하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면,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 마음인지를 점검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천동설의 시대에는 지동설을 주장하면 사형에 처했으며, 성경에 해가 움직인다는 구절들은 비유가 아니라 천동설이라고 주장되었었습니다. 반면에 시대적 정황을 고려하는 것은 예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시대적 정황을 고려한다는 것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를들어 구약에서는 육신의 할례에 대해 문자 그대로 새겨놓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육신의 할례에 대해 구약과는 다른 적용을 합니다. 그래서 구약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거나, 성경은 모순적이어서 신뢰할 수 없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적 정황을 고려했을 때, 구약과 신약은 예수님 안에서 충돌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위의 구절은 종종 우상숭배의 제의적인 의미로 읽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적인 관계에 관련하여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흥미롭게 정리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성경적으로 성관계는 곧 서로에 대한 평생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당시 성경이 쓰여진 사회에서 남성 간 성관계는 그러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나 그때에나 정욕에 근거한 남성 간의 성관계가 존재한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그 시대의 동성애자들이 책임에서 자유로운 성관계를 원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시대에는 동성애자라고해도 책임 있는 관계를 맺고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사회적인 요건이 되지 않았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성애가 받아들여졌던 고대사회라고 하더라도 그 둘이 가정을 이루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사회적 혼란을 주는 성관계 혹은 정욕에 근거하는 성관계의 목록에서 남성 간 성관계가 존재하는 일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사실 비단 그런 예전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금도 사실 동성애와 동성간 성관계가 다르다는 것이 충분히 인식되지 못하고 있고, 간성을 비롯한 성소수자의 사례들도 충분히 인식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지향인 동성애로 정리할 수 없는 모든 부분을 혼동하여 뒤섞어 생각합니다. 


위 본문이 명백히 동성애를 지시하는 것이라고 느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간성 등 성소수자와 관련하여 밝혀진 사실을 통해, 단순히 섹스를 참으면 된다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는 지점들이 밝혀졌습니다. 해가 움직인다는 성경 구절이 지동설을 설명하지 못하듯, 성소수자와 관련된 사실들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물론 정황만을 가지고서  "성경이 동성애를 죄라고 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다만 할례에서의 경우와 같이, 명백히 보이는 문자 그대로가 답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살인, 간음, 도둑질 등과 같이 문자 그대로의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위 본문이 할례와 같은 시대적 상황의 문제인지, 동성애 자체가 다른 죄와 마찬가지의 죄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분별이 필요합니다.

다만 문자 그대로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애초에 동성애를 살인, 간음, 도둑질과 같은 일로 바라보는 혐오의 안경을 쓰고, 성경을 역으로 그렇게 해석하게 된 것은 아닌지 체크해 보아야 합니다. 육체적 할례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 시대적 정황에 역행하여 어떻게 성경 자체의 빛을 가리고 교회를 찢었는지에 대한 일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지 않는다면, 밝혀진 사실과 시대적 정황에서 충돌되지 않는 해석으로 답이 제시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느낌에 명확하다는 것은 내 느낌을 섬기는 일입니다. 내가 서 있던 것이 성경이 아니라 사실은 사회풍조였다면 끔찍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우상 숭배의 결과가 무엇인지는 감춰지지 않습니다. 앞서서 동성애에 대한 사실을 살펴보고, 사실 관계가 무엇인지 살펴 봤습니다. 왜곡되지 않는 진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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