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 속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 (로마서 1:26-27)


위의 구절을 보면 정욕이 바르지 않은 동성 간 성관계를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이는 언뜻보면 동성애는 자연스런 성지향이 아니라 정욕과 다름 없는 것으로 보이게도 합니다. 그러나 성지향이 정욕에 기반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성지향을 가졌더라도 정욕에 기반한 행위를 할 수 있을 뿐이지요. 정욕에 기반한 동성 간 성관계가 있다는 사실과, 동성애가 정욕이라는 것은 다른 말입니다.


밝혀진 사실은, 분명 현대에서도 정욕이 바르지 않은 동성 간 성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사례로 보스턴 지역의 가톨릭 사제들 가운데 약 90명(약 6%)에 달하는 이들이 아동성추행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영화 <스포트라인트> 인데, 왜 여성 아동보다 남성 아동을 선호하게 되는지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보스턴 지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고려했을 때 "성경은 정욕에 의해 바르지 않은 동성 간 성관계가 발생하는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과 부합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사례로 군대내 성추행과 관련된 사례도 있습니다. 이 성추행의 가해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동성애자로 오해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오히려 동성애자들이었다면 이 혐오의 사회에서 추행을 통해 자신의 성지향을 대놓고 드러낼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곧 동성애가 아닌 다른 요소가 군대 내 성추행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밖에도 동성애자가 아님에도 여자복장을 한 남자나 트렌스젠더와 성관계를 갖는 것에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이상성애에 해당하는 것으로 동성애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정욕이 바르지 않은 동성 간 성관계를 만들어내는 사례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과 동성애가 동일하다는 것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현대사회에서도 남녀 간에 바른 관계가 있는 반면, 그와 달리 정욕에 따르는 바르지 않은 관계가 있습니다. 강간이나 간음이 이성애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이성 간 성행위가 존재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정욕을 따르며 강간이나 간음을 한 것일 뿐입니다. 바르지 않은 동성 간 성관계가 동성애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동성 간 성관계가 자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바르지 않은 정욕을 따르는 이들이 바르지 못한 동성 간 성관계를 가진 것뿐입니다.


이성애자 중에서도 성중독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동성애자 중에서도 그러한 사람이 나타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음성적인 일이 흔한 이성애자들 사회에 비해 동성애자들의 사회는 좀 더 좁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데 더 조심스러운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존재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은 육체의 확인을 촉발시키기도 하고, 차별에 의해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관계만이 허용되기도 합니다. 이는 동성애라는 성지향이 태생적으로 문란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의 사회가 그들의 자연스러움을 억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원인은 동성애가 아니라 혐오와 차별입니다.


위의 본문이 동성애 자체를 정욕이라고 말한다는 해석은, 사실의 문제에 부합되는 해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직관적으로 그런 식으로 해석하게 만들고, 오히려 사실에 부합하는 해석을 자의적 해석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 바로 혐오입니다.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기듯 혐오의 안경을 성경의 권위 위에 두는 것입니다.


유독 동성애자들에게 쏟아지는 편협함과 잔인함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정당성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나 차별을 담은 그들의 주장이 사실인 것이 아니라, 혐오의 사회풍조가 그만큼 근본적으로 뿌리내려 있다는 판단이 사실에 부합합니다. 깊게 뿌리내린 어떤 사회풍조는 스스로가 그것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쉽게 분별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느낌이 아닌 사실을 검토하는 작업이 유효합니다. 위의 구절을 보면서 동성애는 정욕과 동일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이 주체가 아니라 자기 느낌을 주장하기 위해 성경을 단지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인과관계를 뒤집에서 생각하는 것은 주어지는 지혜에 기반하지 아니하고 혐오의 사회풍조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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