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나, 술 취하는 사람들이나, 남을 중상하는 사람들이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9-10)


신약에 등장하는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각각의 원어는 arsenokoitai와 malakoi 입니다. 직역하자면 arsenokoitai는 '침대 위의 남자', malakoi는 '부드러운 남자' 정도의 뜻입니다.

전자는 동성 간 성관계를 하는 이(abusers of themselves with mankind, KJV)를, 후자는 이를 받아들이는 이(effeminate, KJV)를 말하는데, 이는 나이 든 남자가 미동을 사서 관계를 갖는 것이 횡행했던 고대 헬라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분명히 이와 같이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행위, 돈으로 남창을 사는 행위 모두 동성애자들 사이에서도 분명히 죄악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행위와 사랑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동성애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여러 역본 중 NASB판에서는 'arsenokoitai'라는 단어를 'homosexuals(동성애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일부 해석만이 성경을 올바로 보고 있는 것이고 다르게 해석한 역본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틴 루터의 시대에서도 확인된 것처럼 오랫동안 이 단어는 '자위행위를 하는 자'라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가 되어서 자위행위는 보편화되었고, 해당 당어는 남색을 뜻하는 단어로 전환되게 됩니다. 물론 단어의 번역이 바뀌는 것은 더 합당한 번역을 찾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에 따라 진정한 뜻을 밝혀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지금의 번역이 지고지순하게 완벽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해당단어가 자위행위자에서 동성애자로 바뀌는 시기에서는 동성애와 부적절한 동성간 성관계가 구분이 되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현재도 성지향으로서의 동성애와는 관련없는 동성 간 성관계를 동성애라는 단어로 이해하는 사람이 공존하기도 합니다. 지금도 단순한 정욕에 근거하는 남성간 성관계나 범죄에 해당하는 남성간 성관계가 벌어집니다만, 그것은 동성애 자체가 단순한 정욕이나 범죄라는 뜻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차별의 사회 풍조 때문에 '동성간 성관계에 관련된 범죄자'와 '동성애자'를 혼동하는 언어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예전에 '자위행위자'로 믿었던 단어를 이제는 일부 역본에서 '동성애자'로 바꾸었으며, 이것을 두고 동성애 자체가 악행이라고 규정하는 것이(앞서 논의했듯 창조 디자인과 다른 것과 악행은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신의 뜻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분명해지는 것은 우리가 '문자 그대로'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에 대한 문제제기 입니다. 어느 것이 ‘문자 그대로’인 것인지요. 돈으로 미동을 사는 사람들일까요?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일까요? 단순히 동성 간 성관계가 아니라 항문성교를 하는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자위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자기가 속해있는 사회문화에 소속되어 성경의 문자를 보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마주하게 됩니다. 


현재에도 해가 움직인다는 구절이 있으니 천동설이 맞다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여전히 문자 그대로 여성차별과 노예제가 맞다고 해석할 수 있는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가치관 위에 정교하고 성스러워 보이는 바벨탑 같은 논리를 세울 수 있습니다. 천동설을 주장했던 이들도, 인종차별이나 여성차별을 주장했던 이들도, 자신들이야 말로 성경 그대로를 믿으며, 자신들과 다른 생각은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상대를 자유주의라거나 근본주의라고 낙인찍으면 마치 자신이 성경을 수호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그 느낌이야 말로 바벨탑 같은 것이며 사실은 그렇게 하는 자신을 높이는 일입니다. 우리가 성경으로 말할 수 있는 주장은 오직 복음뿐입니다.


arsenokoitai라는 원어마저도 단어일 뿐이며 그 단어 자체가 진정한 본 뜻의 주인은 아닙니다. 그 본 뜻의 주인은 세상을 지은 존재시며, 그는 인간이 만들어가는 시대를 초월하여 그 본 뜻을 알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성경의 진정한 뜻은 시대의 지혜와 함께 합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주인은 우리가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알도록 인도합니다. 그래서 주어지는 것이 그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의 빛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때에 맞춰 주어진 지혜와 상충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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