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등장하는 남색은 죄로 분류됩니다. 동성애는 그러한 남색과는 다른 특성을 보이며, 현대의 동성애에서도 성경에 등장하는 남색과 같은 경우는 당연하게도 죄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남색이 아닌 동성애를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여전히 다양한 시선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동성애가 아닌 우상숭배의 제사의식이나 고대의 불평등한 관계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남색을 대표적으로 표현했을 뿐 동성애 자체를 죄로 규정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성관계를 쾌락의 도구로 이용하고, 상대를 물질화 하는 일이라면 죄라는 메시지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해석들도 결국에는 모두 사람의 해석일 뿐입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 온전합니다. 성경은 그 자신이 주체입니다. 사람의 해석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단지 사람은 시대에 허용된 지혜를 받아서, 거기에 반응하며, 성경과 관계를 맺어 가는 것입니다. 

내 주장이 어떻다는 것을 논리로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본 성경으로 내가 믿는 것을 주장하면, 그것은 사실 자기주장일 뿐입니다. 내가 얼마나 완벽한 논리를 가지고 있는 지는 생각보다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자기의 바탕에서 서로 침범할 수 없는 완벽한 논리를 세울 수 있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논리가 다른 논리에 굴복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가 주님에게 굴복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과 온전한 관계 속에 있다는 건 내가 가진 논리, 내의 해석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나의 부족함마저 완전함으로 사용하십니다.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를 통해 갖게 된 생각이라면, 그것은 사람을 살립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진정으로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를 통해 얻은 것이라면, 그것이 어떤 주장이더라도 얘기를 전달받은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는 데 전혀 지장이 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나의 해석으로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며, 성경 자체가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판단을 넘어 때에 맞는 말을 하게 되고, 때에 맞는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성경에 나오는 문자 대로의 말이어서 사랑으로 그를 살리려고 전했던 말인데 동성애자들이 그것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쩌면 그 동성애자의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내 느낌대로, 내 주변의 풍조에 따라 성경을 보고는, 성경을 이용해서 나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나의 정의에 대한 사랑이었지, 예수니므이 사랑이 아니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상대방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주님은 밝히 보여주시기에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살립니다. 말씀은 살아있어 골수를 쪼갭니다.

내가 성경과 온전한 관계에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오히려 내가 성경의 빛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에 있는 경우에는 "나는 너를 살리려고 하는 것이다"는 것을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가 "이 사람은 나를 살리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세상에 증명해 줍니다. 이는 성경에도 나오는 이야기처럼 예수를 믿기에 구별된 삶을 사람들을 보며 주변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불러준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 삶입니다.

그저 착하게 살아서가 아닙니다.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성경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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