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병때문에 죽을 상태라 반려동물을 안락사 시킨다고 하면, 단순히 그 병이라는 악이 세상에서 사라지니까 기쁜 일인가?
돌이킬 수 없는 악함도 병이며 그의 죽음이, 그의 악한 삶이라는 고통을 그치게 한다고 해서 기쁜 일일 것인가?
세상이 한 생명을 길렀으며, 내가 따르는 것이 나 자신이 아니라 세상의 근본이었다면, 세상의 눈으로 그 생명의 죽음을 가벼이 볼 수 없을 것이다.
전쟁은 어떻게해도 옳지 않다. 폭력과 죽음 없는 생명의 문화가 옳다.

그러나 옳다는 것에 레벨이 있어 번뇌를 어느 정도까지 벗어나야 올바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무리 씻고 씻어도 우리는 먹고 싸는 존재다.
완전무결한 선과 비교할 때에, 선하고 훌륭한 사람이나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사람이나 병정개미와 일개미 정도로 다를 바 없는 상태일 것이다.
노력한 도덕성도 만들어 세운 높은 탑이다. 물론 만든 것의 경이로움도 크다. 그러나 그 크기는 그저 생명이라는 경의의 털 하나 만큼도 되지 못할 것이다.
어느 높이에 도달해 있는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만들에 세운 것에 잣대를 두지 아니하고, 자기자신 그대로가 바로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생명과 반응하는 것에, 세상과 함께 걷는 삶이 있을 것이다.

물론 전쟁 자체가 나쁘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전쟁이 있는 사회나 인간이 만든 전쟁이 없는 사회나, 완전함과 비교하자면 또 그리 다를 것도 없다.
전쟁이 없음이 옳겠으나, 나의 더러움을 내가 부정해서 벗겨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반응해가는 과정이 나의 더러움을 벗겨내 주는 것이듯, 내가 전쟁을 없에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도 생명에 반응하는 것이 그것을 해결해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세상과 함께 걷는 삶은 그 사람의 상태에서 생명과 반응하는 것이다. 전쟁, 곧 폭력과 살인을 하는 삶에서 벋어나지 못하더라도 그 안에서 생명에 반응하는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는 더 많이 죽이는 것이 아니다. 포로들을 더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것, 그리고 그 후에 세워지는 사회가 억울함이 줄어들 게 하는 것, 그런 것만이 승리다.
그 승리를 하는 것에서 전쟁도 사라지는 과정에 들어간다.

우리의 전쟁도 그러하다. 우리는 우리가 완벽하려 한다. 우리가 더럽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다보니 나와 비교해서 사람을 더러워하고 욕한다.
그러나 그 정의, 도덕, 완전무결함은 단지 내가 세운 탑일 뿐이다. 사실은 그나 나나 별로 다를 바 없는 상태아니겠는가. 누군가 악이라는 병이 있어 불행을 퍼뜨린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절대 변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래서 그가 사라져야만 하는 존재라고 하자. 그러나 그의 사라짐에 기뻐할 뿐, 그 생명의 소멸에서 먼저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런 가치야말로 거짓이리라. 

우리는 자기의 완전무결함을 위해 타인을 재단한다. 그래. 어찌 보면 그것이 인간이다.
거기에서 생명을 따라야한다며 또 다른 완전무결함의 탑을 세울 필요는 없다.
그저 거짓세상 휩쓸린 자들에게 자비로 대하며, 어느 편에 있든 억울함에 흐르는 눈물에 함께 슬퍼한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이뤄지지 못하게 하는 허상에 굴복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과정이다. 우리는 흐름 속의 한 흐름이다. 내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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