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애의 경우, 그가 보이지 않거나 걷지 못하는 것, 혹은 정신적 다름에 의해 생기는 장벽을 제거하면 된다. 무상의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서로 간의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탈모, 오드아이, 유전적 불임 같은 경우에는, 그것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거두는 것이 장벽을 제거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에게 차별 이외의 장벽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상적 세계에선 'XX=자궁=이성애', 'XY=남근=이성애'가 기본값이라고 해보자. 포유류 뿐 아니라 조류, 곤충 등 양성이 있는 동물에게서는 동성간 성행위가 보편적으로 나타나며 이것이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가정된 이상적 세계를 부정하진 않는다. 오드아이가, 유전적 불임이, 가정된 이상적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탈모가 후천적 영향이 있다는 건 탈모를 촉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소수자에게 후천적 영향이 있다는 건 억압된다는 것을 뜻한다.
성소수자와 탈모의 공통분모가 혐오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탈모를 극복하는 게 이상적 세계를 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염색체와 젠더를 일치시키고 이성애자로 향하게 하는 것이, 'XX=자궁=이성애', 'XY=남근=이성애'가 가정된 이상적 세계를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상적 세계를 향하는 것과 현재를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것은 충돌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혼동하게 하는 것이 혐오다.
[2]
오드아이가 아닌 것이 기본값이라고 할때, 오드아이는 노력해야 하는가? 오드아이와 달리 성소수자는 후천적 영향이 있으니 배우고 선택한다는 시선은 혐오다.
혐오는, 성소수자 혐오가 있는 사회에서 스스로 성소수자이길 거부하지만 성소수자일 수 밖에 없는 사람을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어떤 후천적 영향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억압을 뜻한다.
억압 속에서도 진짜 자기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을 두고 '동성애는 배울 수도 있다'는 시선을 갖게 하는 것이 혐오의 힘이다.
이성애를 배울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성애가 혐오스러운 사회에서는 이성애 기질이 억압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성애를 긍정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의 본 모습을 회복해 갈 것이다. 회복이 그가 이성애를 '선택'한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 되진 않는다. 선택하거나 배우는 게 아니라 자신 그대로를 발견해가는 과정이다.
[3]
성경의 세계에선 여성이 생리와 임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약자가 약한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함께 하는 것이며, 장벽을 제거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자궁을 불공평하게 감당하게 만드는 사회구조가 있고, 남근이 기득권을 갖는 사회구조가 있다. 사회구조적 혐오다. 이것이 여성과 남성, 성역할 모두를 왜곡시킨다.
자궁이 단지 자궁이며, 남근이 단지 남근 일 수 있는 사회가, 'XX=자궁=이성애', 'XY=남근=이성애'가 가정된 이상적 세계를 향하게 할 것이다.
오히려 성소수자가 사회적 왜곡을 거두고, 자궁과 남근을 원래 있어야 하는 자리로 되돌리는데 도움을 준다. 그렇다고 현실에서의 그런 기여도를 두고서 성소수자가 가정된 이상 세계를 향하게 하는 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충돌하지 않을 뿐이다.
**
있는 것은 이것이다.
혐오에 대항하는 것이 가정된 이상 세계를 향하게 한다.
혐오를 극복하는 길은 혐오하지 않는 것이다.
장애의 경우, 그가 보이지 않거나 걷지 못하는 것, 혹은 정신적 다름에 의해 생기는 장벽을 제거하면 된다. 무상의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서로 간의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탈모, 오드아이, 유전적 불임 같은 경우에는, 그것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거두는 것이 장벽을 제거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에게 차별 이외의 장벽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상적 세계에선 'XX=자궁=이성애', 'XY=남근=이성애'가 기본값이라고 해보자. 포유류 뿐 아니라 조류, 곤충 등 양성이 있는 동물에게서는 동성간 성행위가 보편적으로 나타나며 이것이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가정된 이상적 세계를 부정하진 않는다. 오드아이가, 유전적 불임이, 가정된 이상적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탈모가 후천적 영향이 있다는 건 탈모를 촉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소수자에게 후천적 영향이 있다는 건 억압된다는 것을 뜻한다.
성소수자와 탈모의 공통분모가 혐오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탈모를 극복하는 게 이상적 세계를 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염색체와 젠더를 일치시키고 이성애자로 향하게 하는 것이, 'XX=자궁=이성애', 'XY=남근=이성애'가 가정된 이상적 세계를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상적 세계를 향하는 것과 현재를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것은 충돌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혼동하게 하는 것이 혐오다.
[2]
오드아이가 아닌 것이 기본값이라고 할때, 오드아이는 노력해야 하는가? 오드아이와 달리 성소수자는 후천적 영향이 있으니 배우고 선택한다는 시선은 혐오다.
혐오는, 성소수자 혐오가 있는 사회에서 스스로 성소수자이길 거부하지만 성소수자일 수 밖에 없는 사람을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어떤 후천적 영향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억압을 뜻한다.
억압 속에서도 진짜 자기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을 두고 '동성애는 배울 수도 있다'는 시선을 갖게 하는 것이 혐오의 힘이다.
이성애를 배울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성애가 혐오스러운 사회에서는 이성애 기질이 억압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성애를 긍정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의 본 모습을 회복해 갈 것이다. 회복이 그가 이성애를 '선택'한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 되진 않는다. 선택하거나 배우는 게 아니라 자신 그대로를 발견해가는 과정이다.
[3]
성경의 세계에선 여성이 생리와 임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약자가 약한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함께 하는 것이며, 장벽을 제거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자궁을 불공평하게 감당하게 만드는 사회구조가 있고, 남근이 기득권을 갖는 사회구조가 있다. 사회구조적 혐오다. 이것이 여성과 남성, 성역할 모두를 왜곡시킨다.
자궁이 단지 자궁이며, 남근이 단지 남근 일 수 있는 사회가, 'XX=자궁=이성애', 'XY=남근=이성애'가 가정된 이상적 세계를 향하게 할 것이다.
오히려 성소수자가 사회적 왜곡을 거두고, 자궁과 남근을 원래 있어야 하는 자리로 되돌리는데 도움을 준다. 그렇다고 현실에서의 그런 기여도를 두고서 성소수자가 가정된 이상 세계를 향하게 하는 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충돌하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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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은 이것이다.
혐오에 대항하는 것이 가정된 이상 세계를 향하게 한다.
혐오를 극복하는 길은 혐오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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