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실제로 죽었다 살아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가?
지금 시대에 이 땅과 전혀 다른 종류의 원형적 육체로 살아난다는 것과 같은 일이, 십자가 사건과 같이 일어난다면, 절대 그 시대와 같은 기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시기는 기적과 미법이 기능했던 시기다. 지금은 그런 것이 없다. 그렇기에 동떨어진 기적은 최소한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거나 신이 인간으로 내려오는 방향성과 전혀 반대의 이해로 작용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에 그 시대에 등장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만 생각해보라. 죽었다 살아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착취되는 백성들을 중심으로 운동이 일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서는 부활이 일어난다면 오히려 권력이 이것을 독점할 확률이 높아진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어떻게 아래에서 부터 시작될 수 있게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따라서 불공평한 완전한 죽음과 종말론적 희망이 동시에 발현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좀 더 개인적인 맥락과 주관적 인생 안으로 들어가는 일과 곧 연대가 오히려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아닐까.
그리고 또한 지금 시대에 진정 초점을 두어야 하는 또 다른 지점은 오히려 과연 초월적이고 근원적인 육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것은 그의 사상이나 이름이 남는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오히려 전일적 물질과 문화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지금 시대에 이 땅과 전혀 다른 종류의 원형적 육체로 살아난다는 것과 같은 일이, 십자가 사건과 같이 일어난다면, 절대 그 시대와 같은 기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시기는 기적과 미법이 기능했던 시기다. 지금은 그런 것이 없다. 그렇기에 동떨어진 기적은 최소한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거나 신이 인간으로 내려오는 방향성과 전혀 반대의 이해로 작용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에 그 시대에 등장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만 생각해보라. 죽었다 살아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착취되는 백성들을 중심으로 운동이 일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서는 부활이 일어난다면 오히려 권력이 이것을 독점할 확률이 높아진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어떻게 아래에서 부터 시작될 수 있게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따라서 불공평한 완전한 죽음과 종말론적 희망이 동시에 발현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좀 더 개인적인 맥락과 주관적 인생 안으로 들어가는 일과 곧 연대가 오히려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아닐까.
그리고 또한 지금 시대에 진정 초점을 두어야 하는 또 다른 지점은 오히려 과연 초월적이고 근원적인 육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것은 그의 사상이나 이름이 남는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오히려 전일적 물질과 문화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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