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예수가 된다는 건 신이 죽는다는 것이다. 규정된 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다.
예수가 부활한다는 것은 다시 신을 죽인다는 것이다.
신은 철저히 우리에게 얽메어 있다. 우리에 의해 신은 계속 창발된다.
신은 끊임없는 관계에 있다. 그것이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신이다.
초월의 신은 우리가 알 수도 만날 수도 없다. 그저 그의 의지-존재 만이 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예수다. 예수는 예수가 아닐(비인간) 수 밖에 없는 타자 속(규정 밖)에 존재한다.
그를 만나는 것은 관계를 통해서다. 끊임없는 타자-관계가 사랑(의지)을 가지고(존재)한다.
계속 연속되는 관계 속에 사랑이 들어오고, 사랑이 창발된다.
-나는 언제든 생명에서 버려질 수 있었다. 혹은 다른 누군가는 지금도 버려지고 있다.
내가 버려지지 않은 것은, 고정된 진리가 구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운 좋게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평등이다.
내 안락에 머무는 것은 규정이며 죽음이다. 불평등을 알고 존재의 평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랑이다.
죽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죽음만 있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죽음을 선언하는 자가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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