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박광문(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지방에 갈 일이 있어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렸다. 익숙지 않은 곳에선 밥 먹을 곳 찾는 일부터가 일이다. 채식 실천 중에서 동물성을 일체 먹지 않는 것을 ‘비건’(Vegan)이라 한다. 계란과 우유도 피하는 것이다. 한국 밥상에서도 기본적으로 국에는 육수를 내고 김치에는 젓갈이 들어가니, 한국에서의 비건 생활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상황이 이러니 식당 찾기가 일종의 난제풀이가 되기 일쑤다. 좀 더 흔한 음식점 위주로 구성된 터미널 주변은 더욱 그렇다. 평소 생각을 안해보는 일이니, 채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식당을 찾다보면 사람들은 먹을 수 있는 게 이렇게 없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그래도 이런 생활 몇 년 이어가다보니 자연스레 요령이 생겼다. 이럴 땐 오히려 근처 작고 허름한 밥집을 찾는 것이 편하다. 채식으로 조리해 달라고 부탁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음식을 하게 되는 분에게 직접 주문하기도 수월하고, 사람도 적어 번잡하지 않아 평소와 조금 다른 주문을 하더라도 헷갈릴 일이 없다.
“사장님. 순두부찌개 주문하려고 하는데요, 해물이랑 계란도 다 빼주세요. 동물성은 다 빼주시고 채소로만 해주세요. 아, 혹시 육수에 멸치 들어가나요? 그럼 그냥 물로만 해주세요.”
갑작스런 주문에 사장님들의 반응도 다양하다. 고춧가루도 빼느냐, 참기름은 괜찮으냐, 그러면 맛이 없다, 혹은 반대로 그렇게 먹어도 담백하고 맛있다 등등. 채식으로 부탁드린 후에는 자연스레 오늘 만난 사장님은 어떤 말씀을 하시나 기다리는 시간이 된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얼마 전에 들었던 질문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아, 알아요. 이거 종교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아마도 사장님이 말씀하신 종교는 불교와 같은 다른 종교였을 것이다.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네, 맞습니다.”라고 웃으면서 답해드렸다. 내가 채식을 하게 된 배경에는 크리스천으로서 일상의 실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비건이 된 이유를 하나의 사진으로 설명해 달라고 한다면, 내가 고를 사진 한 장은 우리보다 좀 더 검은 피부색을 가지고 새우껍질을 까는 한 아이의 사진이다. 물론 동물권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진의 주인공은 대규모 죽임을 당한 새우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노예노동 중인 아동 역시 이 사진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사진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렇다. 아이의 이름은 뇨 윈이다. 그러나 이름 대신 31번으로 불린다. 새벽 2시에 일어나 얼음물에서 무려 16시간 동안 새우 껍질을 벗긴다. 그 일당은 한화로 치자면 고작 4,900원이다. 우리는 눈앞에 포장된 상품과 광고, 가격으로만 생각하는 일에 익숙해져 우리가 먹는 것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 고민해 보지는 않는다. 그래서 왜 동물이 물건처럼 착취당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항상 힘없는 인간들도 착취당하는 지를 잘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단순히 햄버거 하나가 아니다
햄버거 하나가 만들어지기 위해 음식의 재료로서만 어느 정도의 자원이 필요한지 조사한 연구가 있다. 검색창에 ‘햄버거 커넥션’이라는 검색어를 쳐보면 관련된 정보들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패티에 들어가는 소가 먹는 물과 축사의 땅이 전부가 아니다. 그 소가 먹는 사료용 곡물을 키워내기 위해 필요한 물과 땅이 있다. 그 땅은 아마존과 같은 숲을 밀어버리고 확보한다. 곧 햄버거 하나 마다 열대우림 5.1㎡ 정도가 파괴되고 있다. 당장 집 앞 패스트푸드점에서도 하루 몇 개의 햄버거가 소비되고 있는 지를 살펴보자. 현대인의 육식을 위해 브라질에서만 2초에 축구장 하나 크기의 숲이 사라진다. 지금 여기의 글에서 한 문장 정도 읽는 바로 이 짧은 시간에 말이다. 그렇게 숲이 사라지고 거기에 살던 이들은 숲 대신 들어선 농장에서 노예와 다름없는 노동을 하게 된다. 혹은 다른 곳으로 쫓겨나 거기서 또 다른 노예 노동을 하게 된다.
햄버거 하나에 필요한 사료용 곡물은 0.79kg, 물은 2000ℓ다. ㎖를 잘못 표기한 게 아니다. 2톤의 무게가 맞다. 그만큼 가난한 이들이 먹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을, 착취를 통해 싼 값으로 우리 입으로 넣고 있다. 한우, 한돈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들이 먹는 사료가 거기에서 온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기를 먹일 수 있어서 다행인 것이 아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많은 가난이 만들어진다. 육식은 채식에 비해 사용하는 땅과 물이 10배 정도다. 전 세계 사람들이 채식을 한다면 환경오염이 없는 자연농법으로도 이미 전 세계 기아는 해결된다.
또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다. 축산 분뇨다. 현대인들은 삶에서 분뇨를 생각하지 않게 학습되었다. 그런데 햄버거 하나 먹으면서 생기는 축산 분뇨의 양은 5.44㎏이다. 지금 매장 하나에서 10개의 햄버거를 먹고 있다면 바로 그 시간에만 가난한 지역 어딘가에선 거의 55kg의 분뇨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햄버거 하나 살 돈으로 햄버거 하나에서 나오는 분뇨라도 해결할 수 있을까? 이미 지구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분뇨와 비료를 통한 오염으로 생명체가 살 수 없는 바다가 만들어 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미 그 양이 자원화로 해결될 수 없는 수준이라서 어디 벌판 한 편에 시한폭탄 같은 저장소들이 지금도 늘어가고 있고, 축산 분뇨 탱크를 청소하던 이들이 사망하기도 한다.
수산업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양식업에서도 결국 사료를 먹인다. 숲을 파괴하는 축산업의 또 다른 버전일 뿐이다. 물에 풀어야 하는 사료와 생겨나는 똥만 생각해봐도 그 자체로도 큰 오염이다. 질병이 생길 수밖에 없는 환경에 약을 물에다가 풀어야 하니 농약까지도 뿌려야 하는 것이다. 양식장 주변은 죽음의 공간이 되고, 그 오염이 바로 연결된 바다로 덮친다. 한편 자연산이라는 이름은 잘 꾸며진 이미지일 뿐, 그 실상은 야생동물이다. 1만 년 전에는 육상동물의 99%가 야생동물이었고, 1%가 인간이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육상동물의 1%만이 야생동물이고, 인류가 32%, 육식을 위한 가축동물이 67%를 차지한다. 지금의 멸종 속도는 공룡이 사라진 대멸종 시기에 해당한다. 공룡이 멸종하고 있는 그 정도의 환경이 지금 지구에서 재현되고 있다. 1970년대부터 2010년까지 야생동물 전세계 개체수의 감소량은 육상동물의 경우 39%다. 그전부터 산업화와 함께 얼마나 많은 야생동물이 사라졌는가. 그런데 바다에서도 마찬가지로 39%다. 곧 자연산 해산물을 먹는다는 것은, 공장식 축산이 나쁘니까 대신 고라니나 산양 같은 야생동물을 먹자고 하는 일이다. 존재마저 빼앗기고 있는 이 상황에 해방신학자이자 생태신학자인 보프(L. Boff)는 자연을 “새로운 가난한 자”(New poor)라고 칭했다.
약자부터 희생되는 그 중심에 육식문화가 있다
기후위기의 시대다. 이대로 가면 2050년에는 마지막 균형점이 깨지고 지구 스스로가 더워지게 되면서 더 이상 지금과 같은 기후로는 돌아올 수 없게 된다. 그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2030년까지 전세계 탄소 제로의 달성 여부다. 10년이 채 안 남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육식이다. 이미 육식은 온실가스를 만들어 내는 제1의 원인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에서는 2006년 축산업이 온실가스 원인의 18%라고 발표했다. 세계 환경 문제를 다루는 연구 기관인 월드워치연구소에서는 2009년에 육식에 의한 원인을 51%로 발표했다. 육식을 위해 벌어는 살림 벌목 문제, 축산업에서 생성되는 것이 주로 메탄인 점, 단순히 축산업뿐만 아니라 누락된 수산업까지 더한 수치다.
기후위기는 그 원인을 만들어낸 이들이 아닌 가난한 이들부터 덮쳐오는 인재다. 기후 난민은 국가 간 이동뿐만 아니라 해수면 상승, 사막화 등으로 본래의 살 곳을 잃고 이주하는 이들을 말하는데, 이미 전쟁이 아닌 기후난민이 모든 이주 원인의 1위인 상황이다. 한국과 같은 부유한 국가에서도 가난한 이들부터 이미 희생당하고 있다. 폭염 사망자는 주로 야외 노동자, 이주노동자, 에너지 빈곤층, 노인 등의 취약계층이다. 기록적인 폭염이 있었던 2018년에 폭염 당일 온열 사망자는 48명이었지만, 건강에 취약한 계층에서 폭염일과 관련 초과사망자는 929명이다. 적지 않은 수이지만 소외계층에서 벌어지는 문제이기에 이슈화도 되지 못한다.
코로나 19도 잘못된 육식문화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약자부터 희생되는 그 중심에는 지금의 육식문화가 있다. 우리는 단지 몇 분간 입의 만족을 위해 이 모든 일에 기여하고 있다. 서로 권하면서 조장하고 있다. 나는 안전한 곳에서 쾌락을 누리고 있을 때 힘없는 이들부터 고통당하고 죽어가고 있다. 하나님이 벌을 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욕망이 오히려 하나님에게 벌을 주고 있다. 성경에서는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창 6:12-3)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그 말 그대로 지구적 현실이 되고 있어 간담이 서늘하다. 한편으론 뒤집어 생각해본다. 우리가 채식을 실천한다면 이 비극들을 멈추는 강력한 힘을 얻는다.
단지 몇 분간의 쾌락을 위해 약자들부터 희생당하며 하나님의 계획과 지구 생명을 파괴하고 있다는 말, 이런 발언은 자주 교조적인 태도로 오해받는다. 그렇지 않다. 우리가 웃고, 차를 타고, 일을 하고, 먹고, 이야기 나누고, 잠을 자는 것과 같은 평범한 일상이다. 오히려 일상임을 모르는 것이 문제다. 다만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만 들릴 뿐이다. 무엇이 귀를 막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본모습을 지켜내는 채식 실천
사회심리학자 멜라니 조이는 육식주의(Carnism)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육식주의는 육식에 대한 선호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공장식 축산과 동물의 도구화, 자본 논리에 따른 육식 시스템의 문제와 종사자들의 희생 등을 비가시화 하게 하는 사회적 신념이 육식주의다. 왜 개는 먹지 않으면서, 돼지는 먹을까? 돼지 역시 3살의 지능과 생각을 할 수 있다. 느끼고 잠을 자고 꿈을 꾸는 존재다.
성경은 언제나 통찰의 원천이 되어준다. 지금의 축산업과 성경에 등장하는 목축 사회는 같은 것이 아니다. 성경의 목축은 대량생산과 우유를 위해 지금처럼 끝없는 강제임신 곧 수간을 하지 않는다. 양들은 사육당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초원에서 본래의 삶의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도록 지켜진다. 지금의 육식과 달리 선한 목자는 양들을 단지 성전 앞에 판매하는 상품과 같이 도구화하지 않았다. 목자는 양떼 속의 모든 양을 안다. 한 목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그의 온 생명을 안다. 그러나 목축이 아닌 사육을 해야만 하는 돼지는 상황이 달랐다. 지금이나 성경시대나 마찬가지로, 사육은 그들의 본래 모습을 억압한다.
동물들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 고통을 피하라고, 행복하라고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생명의 주체이시다. 자연 속 육식동물의 삶을 보라. 육식동물은 서로가 하나님이 계획한 본래의 모습을 지켜준다. 국립공원의 사슴을 지킨다며 늑대를 잡았다가 급증한 사슴으로 숲이 파괴되어 오히려 사슴이 더 위험해진 사건이 있었다. 다시 늑대를 풀어 넣고 나서야 숲과 사슴의 개체수가 회복 되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는 모두가 서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
하나님의 계획과 현대문명의 육식은 같은 것이 아니다. 개는 먹지 않으면서 소, 돼지, 닭들을 공장식 축산에 밀어 넣는 이 상태가 정당하다는 주장에는 어떤 근본적 근거도 없다. 다만 자기 쾌락을 하나님의 주체성보다 먼저 두게 만드는 육식주의가 만든 합법이 있을 뿐이다. 현대문명의 육식은 가난한 이들과 새로운 가난한 자인 자연을 파괴한다. 비인간 동물을 포함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도 함께 도구화 시킨다.
그러나 이 죄악을 벗을 힘은 다시 주님에게서 온다. 내 입에 단 것을 찾기 전에 주님을 생각해본다. 밀려난 이들, 취약한 이들, 고통당하는 이들 앞에서 눈물 흘리시는 주님. 그럼에도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 고통을 치유하는 역사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인간도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모든 생명, 특히 가난하고 약한 자들, 고통 가운데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며, 서로의 본모습을 지켜주며 함께 웃는 실천으로 초대하신다. 우리에겐 새로운 일상이 열려있다. 마치 삶의 방향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기도의 일상이 필요하듯, 이제 채식의 실천으로 다시 쓰는 일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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