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성적이라기보다 미신적이다.
생각보다 인간의 인지는 조악해서 실재를 살기보다는 미신에 기반한다.
사실 이성이라 부르는 것은 잘 꾸며진 권력이다. 그런 게 권력의 특성이기도 하고.

미신에는 이유가 없다. 미신 자체가 이유다.
다양한 동물들이 존재하면서도 지배적인 종이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는 다양한 미신들의 생태계 속에서 살아간다.

불안증은 이 미신이란 것을 하나의 이성인 것으로 만들려 한다.
곧 절대성과 보편성은 진실이라기보다는 사실 권력이다.
그때 미신은 본래 미신으로서의 신비를 잃고, 권력으로서 천박해진다.
불안은 교묘하게 자리잡는다.

미신이 본래의 신비가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오히려 여전히 미신일 수 있을 때에 가능하다.
그것이 일종의 미신임을 알게 하는 다른 빛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한다면 그건 퍽 비루해진다.
그때 인간은 사실 화려하게 꾸민 죽음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개념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이 아닌 것으로만 이루어 진다. 햇살을, 비와 개울의 노래를, 식물의 거대한 걸음을, 동물의 춤을 통해 인간을 만날 때, 인간은 미신을 회복한다.

기독교도 다르지 않다.
오히려 뻔한 십자가 부활의 권력은 회칠한 무덤이다.
사람들은 쉽게 오해하는데, 사후세계나 마법의 절대신이 권력이 될 때, 그것은 미신의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의 영역이다.

오히려 미신의 기독교는 옛 이야기로 존재하기도 한다.
단군 설화에서 진짜로 곰이 쑥과 마늘을 먹은 것이 아니라 곰 부족인 것을 알때, 오히려 그 설화는 또 다른 실체가 된다.
이성 밖의 신비이자 관계가 된다.

이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닌 것으로만 이루어 진다.
다른 종교는 오히려 더 가까운 친족이다.
그랬을 때 멀리 있는 다른 종교인 무신론이란 미신도 만난다.
그 미신의 생태계에서 기독교는 신비를 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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