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는 네페쉬 하야다. 하나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한 몸의 호흡은 각 세포들에게 들어간 호흡, 세포호흡의 총합이다. 이렇듯 한 관계 속에서 각 구성원이 그들답게 되는 것, 그것으로 한 몸을 지어가는 것이 육화다.
육화로 없던 게 생기게 된 것이 아니다. 암세포 같이 관계를 없애는 위계적 배제를 극복하는 것이, 육화됨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관계를 통한 하나됨, 곧 네페쉬 하야가 동물이다. 동물이 생령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단위를 단순히 세포에 두기보다는 기관에 둔다.
심장, 뇌, 폐와 같이 말이다. 곧 하나됨을 인식한다는 것은 각 기관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 기관다움에서 벗어난 세포는 암세포다. 그것은 하나된 관계에서 벗어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동물을 본다는 것은 그 동물다움, 그 종 다운 서식처와 생태, 관계성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개를 볼때 그렇게 보고 있는가? 개는 늑대랑 같은 종이다. 개를 보호한다는 것은 인간이 보기에 귀엽게 보이도록 장애를 만들고, 소유하고, 인간의 집에 감금하고 이동권을 보장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들개가 먼저 있는 회복된 개다. 늑대로 회복되고 있는 집늑대다.
여기에서 보듯이 우리는 동물다움으로 동물을 보기 보다는 개체주의적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이 개체주의가 동물인 인간이란 종에게도 작용한다. 우리는 한 인간 개체가 무엇을 소유했는지, 어떤 소유권을 보장해 줬는지를 통해 그 인간을 규정한다. 그가 동물로서 응당 보장되어야 할 서식처, 이동권, 생태, 관계로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다른 종에게 하는 개체주의는(앞서 개에 대한 사례처럼), 그 자체로 인간이 기준이 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위계적 배제다.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개체주의는, 정상성 규정이나 소유권이 기준이 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위계적 배제다.
그래서 인간이 개다. 둘 다 동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생령, 네페쉬 하야가 아니게 된 것이다.

어쩌면 육화는 그들다움을 벗어나는 것에서 돌이켜 하나된 관계로 돌아가게 하는 활동과 관계다.
이때 네페쉬 하야, 곧 생령=동물은 완전한 생령다움=동물다움 속에 발견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생령=동물의 부정을 통해 드러난다.
우리는 생령=동물다움이 무엇인지 모른다. 육화의 일은 육화가 한다. 우린는 다만 생령=동물이 부정됨을 통해 생령=동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자면, 동물은 동물로서 인식되지 않는다. 서식처와 고유의 관계를 갖는 존재가 동물인데, 인간은 자기 눈 앞의 개체만 인식한다.
인간은 그렇게 소유의 눈으로, 개체주의적으로 대상화하고 애호한다. 동물의 서식처와 관계를 제거한 채 동물을 규정하는 것은 동물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육화를 지우는 것이다.

그렇기에 동물은, 그들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날 수 없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렇기에 동물은 동물이 아니다. 오히려 동물은 호모 사케르다. 그것을 통과할 때 비로소 동물을 만날 수 있다.
아픔이 있는데, 다른 건강한 부분을 보며 건강해 지라고 하는 것은 한 몸이 아니다(장애 극복 이데올로기가 그러하다). 아픔이 있는 곳으로 온 몸을 굽히는 행동과 관계를 통해 한 몸이 드러난다. 이 한 몸은 한 개체의 몸이기도 하고, 한 공동체의 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육화는 그 개념 자체일 수 없다. 단순히 그리스도가 육화이니 모든 친족에게 선을 행하자는 것은, 건강한 부분을 보며 건강해 지라고 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신이 낮아졌으니 우리도 낮아지자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불교식 열반으로 이르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독교적 접근, 다시말해 그리스도적 접근, 육화의 접근은 그와 다르게 출발한다.
낮아져 버린 곳, 다시 말해 아픔이 있는 곳, 동물이 아니게 된 곳, 시민이 아니게 된 곳이 시작이다. 함께 낮아지는 일이 한 몸을 드러낸다. 동물이 아니게 된 것, 종차별주의나 대상화의 고통으로 함께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됨을 통해 한 몸, 곧 동물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함께 시민이 아니게 된 일을 통해 시민을 드러낸다.
신이 육화했으니 윤리로 삼아야 한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지금여기 한 아픔을 향해 온 우주가 굽히는 것으로 하나됨이 드러나는 것처럼, 단순히 육화했으니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에 동참하는 곳을 통해서 육화=네페쉬 하야=생령=동물이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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