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완벽한 하나의 운명으로만 되어 있다면, 결국 하나의 존재만 있는 것.
그러나 우연은 다름을 만들고, 다름이 서로의 마주함을 만든다.

그렇다고 마주함을 우연의 결과라 보는 것이 맞을까?
어쩌면 마주함이 하나의 운명을 깨고 우연을 부른 것은 아닐까?
우연과 마주함은 인과가 아니다. 같은 것의 다른 측면이다.

그런데 우연은 다름을 만들어 언제나 아픔만을 만든다.
이유 있는 고통이란 건 없다. 단련을 위해?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그런 것이 아니다.
마주함을 바랐을 때 고통이 왔을 뿐이다. 마주함이 목적이었던 것이지, 아픔이 목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주는 우연이다. 그래서 우주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고통을 피하고 싶었지만 하나보다 더 큰 고통은 없었다고.
그리고 그만큼 고통을 알기에 어떤 고통도 작은 것이 아니라고.
모든 고통이 우주만큼의 고통이라고.

그래서 구원은 종말이다. 아플 수밖에 없는 세상의 멸망이다.
우리는 마주하고, 아픔을 만난다. 나도 함께 멈춘다. 아픔 앞에서 함께 우주를 접는다. 그렇게 운명에서 해방(ܝܫܘܥ)된다. 그렇게 새로운 우주가 탄생한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투쟁이다.

아픔의 이유는 더 나은 세상 때문이 아니다. 그런 것은 아픔을 지운다.
오히려 어떤 아픔도 영원히 없던 일이 되지 않도록 한 우주를 영원히 저장한다.
저장 후에 새로운 우주가 다시 써진다. 한 글자, 저장되고, 한 글자, 써지고 있다.
눈에 보이는 지금 이 우주는 단지 하나의 글자일 뿐, 방금 전 멸망한 우주 그리고 그 앞, 멸망한 모든 이전의 글자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더 나은 글자는 없다. 마주함과 아픔으로 채워지는 사랑과 해방의 이야기가 있다.

우연의 우주, 이 우주의 본질은 마주함과 아픔과 사랑=투쟁이다.
모든 아픔은 우주의 아픔이다. 나의 아픔은 우주의 아픔이다.
우리는 만나고 아프고 사랑하고 투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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