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믿음은 F22 지속성 망상장애와 가깝지 않을까?
다만 그것의 수행이 불편함을 경험하게 하거나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면 장애로 분류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BDSM은 F66.5 가학-피학증과는 다르다. 질병 코드 F66.5에 해당되는 것은 단순히 SM의 '성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과 피해를 만들어내는 '상황'에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당연히 이는 BDSM자체가 아니다.
당사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혐오와 다르게, 상호합의가 전제되어 있는 BDSM은 성적 주체성과 해방에 가까이 닿아 있다.

장애와 비장애의 차이는 불편함을 경험하는지 아닌지의 차이일 뿐이지, 옳고 그름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엔 통상적인 것의 바깥을 바라볼 수 있는 다양성이 있다.
장애와 질병에 대한 혐오와 분리, 정상성 규정을 넘어설때 오히려 진실하고 풍성한 세상이 보인다.

기독교의 믿음을 현실도피라 말한다면, 그 본질은 무엇과 닿아 있을까?
그것은 이 불합리한 세상의 종말이다. 이때, 현실 바깥에 있는 새로운 세상은 단순히 상상이 아니다. 실제로 나를 구성하며 나의 존재를 통해 실제로 현실의 세상을 구성한다.
이러한 과정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해방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이유로, 장애로 분류되지 않는 다른 이유가 있기도 하다. 정상성 규정을 하는 힘의 문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국가주의, 가부장제와 같은 것들은 사실 장애로 분류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자신과 일체화되어 과대망상에 닿아 있는 이것들의 수행은 피해를 준다. 그럼에도 이것들은 위력에 의해 정상화 되고 있다.
기독교의 믿음도 마찬가지다. 타자를 지배하는 힘에 관련된 믿음이라면 장애로 분류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피해를 주는 일의 수행이 나쁜 것이지, 장애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반면 BDSM과 마찬가지의 선상에 있는 이 믿음은 참되다.
현실의 바깥으로가서 종말론의 현실을 살아간다. 하나님 나라가 지금-여기에 있다.
정상성 규정의 위력을 넘어서서 질병이나 장애, 소수자, 타자를 분리하지 않고, 함께 세워지고, 함께 해방을 살아간다.
그 해방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의 세상 역시 이 세상과 산 자들을 구성하는 물리적인 것으로 재림한다.
비정상으로 내몰려 비가시화 되었던 진실의 세상과 함께 손잡는다. 함께 넘어선다.

믿음은 무엇인가? 그건 단순히 개인의 강한 신념으로 설명되어선 안된다.
믿음이 무엇인가는 오히려 무엇과 관계 맺고 있는가이다.
정상성 규정의 위력과 관계 맺는가?
아니면 질병권, 장애 해방, 비가시화된 존재들, 함께 내몰리는 관계를 맺고 있는가?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던 것 같다. 믿음을 정신질환처럼 말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변명할지(사실은 왜 우월한 지를 어떻게 가르쳐줄지) 고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본다면 그냥 그거면 된다고. 그것도 좋은 일이라고. 그렇게 말하면 된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그래서 다양한 우리가 그모습 그대로 만날 수 있었다고.
불안해할 필요가 없는 것은, 내가 맺고 있는 관계, 내가 함께 하는 이들이 이미 진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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