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조디자인의 완전성이라는 기준에 대해

탈모나 오드아이는 창조디자인이라는 완벽성에 부합하지 않는다. 원죄의 결과로 세상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모발이식을 하고 칼라렌즈라도 껴야,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고, 회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치료받아야 하는 대상인가? 그 치료가 정말 창조디자인의 완전성을 위해서인가?

탈모는 탈모 그대로, 오드아이는 오드아이 그대로 온전하다. 창조디자인의 완전성이라는 기준을 두어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조디자인의 완전성에 대한 반대적 사례가 있다. 콘돔은 즐거움에 기반하며 인간의 기술로써 창조디자인에 정확히 역행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가장 불경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없어져야 할 죄인 취급을 하고 있는가?

한편으로 궁극적인 여성상과 남성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성소수자의 존재가 그러한 궁극적인 여성상과 남성상을 혼동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회문화적 성역할 고정관념이 그러한 궁극적인 여성상과 남성상을 왜곡시키는 원인이다.

창조디자인의 완전성이 성소수자를 죄인으로 만들 수는 없다. 단순히 죄가 죄일 뿐이다. 그런데 '성소수자는 죄이기 때문에 창조계획 안에서 죄'라고 하는 순환오류에 빠진다. 그러한 사실 관계를 오해하게 만드는 인식은 성경에서 오기는 힘들것이며, 단지 내가 속한 곳의 문화나 자기 소견에서 왔을 확률이 높다.



[2] 동성애는 동성애가 아니다?

동성애는 동성에 대한 성지향으로, 동성애자는 다양한 성소수자 중 하나다. 동성애는 이성애의 반대가 아니다. 양성애, 무성애를 비롯하여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그러나 동성애라는 단어는 사회적으로 분화가 덜 되어 있다. 동성 간 성관계가 이뤄지는 모든 경우를 동성애라고 부르고 있다.

예를 들어 군대 내 성추행, 사제 사회에서의 아동성추행(특히 남자아이) 현상 등은 동성애라는 성지향이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폐쇄적 사회에서 나타나곤 하는 일인데, 이런 류의 일에서 일종의 상용적인 속어로서 '동성애'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동성애자가 아니더라도 여장 남자를 사서 섹스를 즐기는 등 동성애와 관련없이 쾌락을 위해 동성 간 성관계를 갖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동성 간 성관계가 나타나는 모든 경우를 속어로서의 '동성애'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성소수자가 무엇인지 알려진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회적으로는 동성애라는 단어가 혼용되고 있다. 그렇기에 과거에는 더더욱 동성애라는 단어가 동성애라는 성지향을 뜻하기 위한 단어는 아니었다. 그러한 혼용은 차별하는 이에게는 별 문제 없으나 차별받고 있는 이에게는 끔찍한 문제다. 흔히들 혼용하고 있다고 해서 그냥 혼용해서 사용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3] 동성애와 건강

에이즈는 콘돔을 하지 않을 때 옮겨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남성 동성애자 사이에서 에이즈 확률이 높은 것은, 동성애 질병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사회 안전망에서 변두리에 있기 때문이다.

항문성교로 변실금을 얘기하지만, 변실금은 임신 때문에도 나타난다. 항문성교로 변실금이 증가한다는 연구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항문성교가 변실금에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연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정말로 억지로 항문성교가 변실금의 확률을 높인다고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쉽게 용인되고 있는 식습관보다 훨씬 안전하다. 탐식이자 몸을 망치는 식품첨가물, 도덕적 생태적 문제가 많은 GMO, 건강하지 않은 현대 식습관 등은 변실금보다도 더욱 현실적이고 훨씬 나쁜 영향력을 미친다. 그럼에도  이들은 쉽게 용인되는 반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변실금은 삼각한 것처럼 만들어 놓는다. 이렇게 차별적으로 태도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사실에 기반해 있다기보다 혐오에 기반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성애가 정신 건강에 나쁘지 않듯, 동성애가 정신 건강에 나쁠 수 없다. 그럼에도 동성애자 청소년 거의 전부가 자살을 생각하며, 실제로 시도하는 게 반 정도다. 이것이 차별과 혐오가 얼마나 심각하게 자행되고 있는 지에 대한 증거임에도, 역으로 동성애를 비난하는 일로 사용하기도 하니, 정말 끔찍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동성애자들에게서는 어렸을 때의 트라우마가 발견되곤 한다. 실제로 어렸을 때의 충격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혼동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마찬가지로 건강하게 아무 사고 없이 평생 동성애자인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렸을 때의 충격이 어떤 성지향의 원인이 아닌 것이다. 동성애의 원인은 오로지 본인의 성지향이다. 이렇게 제대로 인과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바로 혐오다.



[4] 동성애에서 벗어난 사례

동성애자에서 이성애자가 된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애초부터 그런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동성애자와는 또 다른 다양한 성소수자의 스펙트럼 사이에서의 정상적인 하나의 성향일 뿐이다. (탈동성애라는 말은 없다 http://gmoon.tistory.com/259)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동성애자가 이성애자가 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애초에 성지향이 그렇게 변경 가능한 소수가 있을 뿐이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가 심한 곳에서, 동성애의 성지향이 억압되는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애초에 그가 어느 정도 유연한 성지향을 가진 경우일 수도 있고, 그는 평생 타인에게 끌림을 가져보지 못하고 사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성지향이 조절될 수 있는 사례가 아니다. 본래의 모습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차별이 있는 것일 뿐이다. 온전함은 오히려 그가 그의 본래의 성지향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5] 성소수자로서의 동성애자

"동성애 기질은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문제이므로 죄라고 할 수 없지만, 동성과의 성관계 행위는 선택의 문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결단하여 참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소수자라는 사실의 문제로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성소수자 중 하나인 간성(intersex)을 살펴보자. 간성이란 남성이나 여성으로 정의내릴 수 없는 육체를 가진 경우다. 여성과 남성의 생식기 모두를 가지고 있거나, xx, xy 이외의 성염색체를 가진 경우도 있고, 자신의 성염색체와 반대의 성이나 다른 성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 중에 xy유전자를 가졌지만 여성의 몸과 마음을 가진 사람을 예시로서 생각해보자. 그는 유전자적으로 남성과의 성관계가 동성애가 되니까 성관계를 참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남성으로 성전환을 하고 여성과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하는 것인가? 만약 겉모습으로 태어난 그대로가 맞다고 한다면,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 모두를 가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슴이 좀 있으면 여성으로, 잘 드러나지 않으면 남성으로 수술해야 하는가? 그렇게 성기를 조절할 수 있는 거라면, 남자에서 여성으로 수술한 트렌스젠더 여성의 경우 수술 전에 가슴이 좀 나와 있던 사람이면 괜찮고, 아니면 다시 남자로 수술해야 하는가?

이런 이어지는 질문들에 대해 한 치의 오점도 없는 판결이 있을 것처럼 느껴지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지향이나 성정체성은 탈모와 오드아이를 창조디자인의 완전성을 위해 치료해야 하는 것이 아니듯, 이미 온전하다. 타인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며, 그 스스로 정체화해 가는 것이다.

그 안에서 양성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완전한 논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오히려 사실을 편향된 것으로 여기고,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힘이 작용되기 때문이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넘어가듯 시간은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지구는 돈다.



[6] 창세기 19장 동성애를 말한다는 주장

온 마을 남자가 동성애자일 수 있는가? 가상적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 현실세계에서는 온 마을 남자가 동성애자일 확률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여전히 성지향으로서의 동성애와 동성 간 성관계가 포함되는 일을 동성애라고 부르는 일이 혼용되고 있다.

성지향인 동성애와 그것이 아닌 사회문화적인 동성 간 성관계에서, 후자가 존재하니 전자가 나쁘다고 하는 건, 성범죄가 존재하니 이성애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논리다.



[7] 레위기 18장, 20장 동성애를 말한다는 주장

적어도 여기서 만큼은 반박할 수 없이 명확해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문화적 고정관념 안에서만 명확하다.
간성의 경우를 다시 떠올려보자. 애초에 성별이분법으로는 절대 명확해질 수 없는 사실이 존재한다. 성경이 얘기하고자 한 것이 동성 간 성관계 자체를 얘기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한다면, 간성은 누구와도 성관계를 하면 안된다는 결론 이외에는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성별이분법이라는 문화적 고정관념으로는, 고정관념 밖에 실재하는 성소수자들의 예외사례를 제거하려 든다.

이러한 인식의 한계를 유발하는 고정관념으로 천동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청동설의 시대에는 성경에서 해가 움직인다고 한 구절이 비유가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이라 믿었다. 발견되는 예외 사례들은 천동설의 완전성에 억지로 끼워맞춰지거나 제거되었다.
이처럼 천동설을 고집하는 것과 같은 심리적 상황에서는, 현상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해석을 두고도,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라며 반대하며, 자기가 가진 신념이 사실이기도 하고 성경적이기도 하다고 믿는다.
스스로는 그런 행위를 성경을 보수적으로 읽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사회문화적 보수성이지, 성경적 보수성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사실에 부합하는 해석은 지동설 시대의 성경읽기처럼 모호하지 않다. 예를 들자면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성관계는 여성과 남성의 부부 관계를 뜻했다. 그러한 부부 관계 이외에 존재하는 관계에서는, 성을 신의 계획 안에 있는 선물로 여기지 않고, 오직 쾌락을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문화 속에서는 동성 간 성관계도 어쩔 수 없이 부부 관계 밖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관계였다.
성지향인 동성애와 그 관계는 간성의 경우와도 마찬가지로 쾌락이 아니며, 완전함이 아닌 온전함이다. 그 당시 레위기가 성의 원래 계획보다 인간의 쾌락을 앞에 두는 일들을 지적하고자 했던 것이라면, 완전함은 아니나 온전함에 해당하는 성소수자들의 관계도 지적한 것이라고 하기엔 무리인 부분이 있다.
이러한 해석은 난자와 정자를 통해 수정되는 완전한 법칙에 부합하면서도, 성소수자의 사례에 대해서도 부합할 수 있다.

위와 같은 해석을 예시로 든 목적은, 그러한 해석이 완벽하다고 하려고 함이 아니다. 다만 간성과 같이 실재하는 사실 앞에서, 자기 주장에 대한 믿음을 위해 잘못된 해석을 옹호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보수적 성격해석이 아니라, 문화적인 보수성일 뿐이며, 오히려 성경을 주체로 두는 것이 아니라 선별하는 자신의 권위를 성경 위에 두고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8] 사사기 19장 동성애를 말한다는 주장

동성애자인데 여성을 윤간할 일은 없다. 동성애자의 정상적인 관계가 아닌 경우에도 동성과의 성관계를 요구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동성애가 될 수 없다. 그들이 죄를 지으려고 한 것이지, 동성애가 죄인 것은 아니다. 죄 지은 이성애자들이 있다고 이성애가 죄가 되지는 않는 것과 같다.

해당 본문은 문자 그대로 남자를 내놓으라고 했던(아마도 성폭행이 포함된 목적으로) 무뢰배들이 윤간을 한 것이다. 동성애나 양성애를 명시한 것이 아니며, 성지향과 상관없이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오히려 눈 앞의 사실도 보지 못하게 되는 일은, 성경 역시 성경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편향된 자기 느낌에 기인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에 대해 느끼는 ‘토에바(תּועבה)’, 곧 ‘가증한 것’ 혹은 ‘역겨운 것’과 가까운 느낌은 그가 그런 성지향을 가지고 있는 것뿐이다. 반대로 동성애라는 성지향이 그에게 자연스러운 것과 다르지 않다. 동성애가 죄이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갖게 해준 것이 아니고,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이 나만의 고유한 성지향인 것이다.



[9] 로마서 1 동성애를 말한다는 주장

사제들의 아동성추행 등, 죄 된 정욕으로 동성 간  성관계가 이뤄지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죄 된 정욕으로 그러한 동성 간 성관계가 이뤄지는 것이지, 동성애자와 그들의 사랑에 기반한 건강한 성관계까지도 죄 된 정욕에 포함된다고는 할 수 없다. 죄 된 정욕에 근거하는 동성 간 성관계는, 다른 불의들과 마찬가지로 불의에 속한다. 도덕적 가치판단에 있어서 악한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동성애는 성지향으로서, 오드아이처럼 선악의로 말할 수 없는 특성이다. 그 자체가 죄된 정욕이 되는 건 죄된 정욕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정욕에 의한 동성 간 성관계와, 성지향으로서의 동성애와 그 관계를, 동일한 '동성애'란 단어로 혼용하고 있는 차별적 현상이 있다. 해당 본문에는 문자 그대로 죄 된 정욕으로 동성 간 성관계를 하는 것에 대해 써있다. 동성애가 죄 된 정욕이라고 써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해야만 한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성경 내용을 확장해서 동성애라고 읽고 있는 것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는 돌아볼 필요가 있다.



[10] 고린도전서 6장, 디모데전서 1 동성애를 말한다는 주장

동성애자(homosexuals)라고 번역된 구절의 원어는 'arsenokoitai'이며, ‘침대 위의 남자’ 정도의 의미였다. 해당 단어는 20세기까지는 주로 ‘자위행위자’로 번역되었었다. 그러나 자위행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면서 동일한 단어가 ‘동성애자’라고 번역되는 역본이 생겼다. 물론 현재에도 모든 역본에서 ‘동성애자’로 번역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보수적인 교단에서도 번역이 바뀌는 일들은 정상적으로 이뤄져왔다.

죄 된 정욕에 근거하는 동성 간 성관계와 동성애라는 단어가 제대로 분화되지 않았던 시기에, 일부 역본에서 해당 단어를 동성애자로 번역했던 것은 어떤 면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arsenokoitai'를 성소수자인 동성애자로 읽는 것이 문자그대로 성경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보수적으로 성경을 읽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성경을 자기 입맛의 색깔대로 해석하는, 자기 사회보수적인 색안경이다.



[11] 그만두어야 할 '동성애'란 혐오표현

긴 글을 통해 동성애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그러나 성지향인 동성애와 사회적 속어인 동성애는 다르다. 속어로써의 동성애는 일종의 혐오표현이다. 빨갱이 같은 프레임일 뿐이다.
동성애라는 혐오표현이 아닌 성소수자라는 정상적인 용어를 사용해야하고, 성소수자 중에서 구분하기 위해서는 '성지향으로서의 동성애'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오해를 줄일 것이다.



[12] 보수적으로 성경 읽기

성경을 보수적으로 읽는 다는 것은 무엇일까?

1세대 교회에서 여전히 육체적 할례를 주장하는 이들을 두고 성경을 보수적으로 읽은 것이라 하진 않는다. 사실은 보수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고 자기 문화적 보수성으로 성경을 읽었던 이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진정 성경을 보수적으로 읽는 다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모본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면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는 거다'라고 자기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한다'고 상대방을 통해 고백되며, 그가 나를 '그리스도인'이라 불러준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 보수적으로 성경을 읽고 있다고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따라 성경을 읽는 것만이 있으며, 그가 어떻게 성경을 읽고 있는지는 오히려 세상이 증명해준다.

성경 해석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성경이 주체다. 성경이 주체가 되면 내가 예수님이 가신 곳으로 보내지고, 사람들이 살아나고, 그 자리에 주님이 살아계신다.

성경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적으로 성경을 읽는 다는 것은 내가 보수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성경이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성소수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세상의 혐오로부터 받는 고통을 동일하게 마음아파하고 있는가?

당신이 읽는 성경은 당신을 어디로 가게 하고 있는가?

그들이 나를 통해 알아가는 것이 나의 해석인가 예수인가?

어둠은 실체가 아닌 그림자일 뿐이다. 성경은 빛을 얘기한다.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두움은 어두움으로 놔두어도 된다. 자기 기준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진실과 멀어지고 위선으로 둘러싸일 뿐이다. 그들의 거짓 사랑이 진짜 사랑에 상처를 입힐 수 없다. 어두움은 사실 진짜 힘이 아니다. 오로지 내가 진짜 사랑에 함께 하는지 아닌지만이 있는 것이다.



(*참고 : [전문] 성경과 동성애의 온전한 관계 http://entolre.tistory.com/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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