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1. 자의적인 성경해석에 대한 경계

2. 사실에 근거하는 지혜

3. 창조섭리와 동성애

4. 동성애와 후천성의 문제

5. 동성애와 치료의 문제

6. 동성애와 질병의 문제

7. 동성애와 가정의 문제

8. 동성 간 관계의 다양성

9. 창세기 19:4-8과 동성애

10. 레위기 18장, 20장과 동성애

11. 사사기 19:22-25과 동성애

12. 로마서 1:26-27과 동성애

13. 고린도전서 6:9-10과 동성애

14. 디모데전서 1:9-10과 동성애

15. 성경과 나의 온전한 관계

16. 예수님은 그곳으로 가서 함께 우신다



1. 자의적인 성경해석에 대한 경계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영향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판단이 정말 성경에 기반한 것인지 아니면 사회풍조에 기반한 것인지를 구분하는 일은, 쉽게 느껴지는 것과 달리 그리 수월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그 분별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오히려 성경을 쓴 이는 그러한 분별을 원하실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러한 분별을 위해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해가 움직이는 것을 표현한 구절이 있습니다(시편 19:5-6). 천동설의 시대엔 성경에 쓰여 있는 구절이 천동설을 표현한다고 믿고 있더라도 성경을 잘못 읽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 관련된 분별이 필요했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체의 비밀이 밝혀지는 시대에는 그에 맞춰 필요한 지혜가 주어졌습니다. 이때 지동설의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는데도 성경에는 문자 그대로 천동설이 맞다고 써 있다며 핍박하는 것은, 사실은 성경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사회풍조를 따른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라는 말이 존재합니다만 성경의 본 뜻을 아는 일은, 자기 느낌에 따라 경솔하게 이뤄져서는 안될 일입니다. 성경에는 문자적으로 여성의 열등함을 표현하거나, 노예제를 찬성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자기 느낌으로 성경을 읽은 것일 뿐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들의 주장과 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이 읽는 사람에 따라 마음대로 바뀌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애초에 천동설이 아니었으며, 차별이 아니었을 뿐입니다. 성경은 내가 주체가 되어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주체이며, 나에게는 다만 시대에 맞춰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렇듯 성경의 이해와 적용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강이 흐르듯 시대는 변합니다. 성경은 언어의 분화가 부족한 고대 문자로 쓰여 졌으며, 제한된 시대를 배경으로 쓰여 졌습니다. 그로인해 파생되는 비본질이 존재할 수밖에 없지요. 예수님과 사도들이야말로 구약으로 주장되어지는 여러 규례의 비본질성을 지적하곤 하셨습니다. 흐르는 시대 속에서 그 본래의 의미가 지켜지도록,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와 함께 성경은 살아있습니다. 성경의 본질은 오직 하나이며, 어떤 시대에라도 언제나 온전하며, 동일한 빛을 비춥니다.


우리는 성경이 문자 그대로 여성의 열등함을 말하거나 노예제를 지지한다고 모함하는 이들에게, 해석을 붙여 성경의 본 뜻을 밝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의적인 성경 해석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이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인지 혹은 자의적 해석은 아니었는지를 분별하기 위해, 우리는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가 가진 중요한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사실에 근거하는 지혜


마치 예수가 당하셨던 것처럼,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는 종종 사회풍조에 의해 핍박 받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엔 사회풍조가 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 지혜는 사실에 근거하며, 사실이란 것은 결국에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은 중요한 지표입니다. 세상의 원리를 지은 존재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그가 지은 원리와 상충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회풍조를 따르는 이들은 사실을 조작합니다. 여성이 왜 열등한지, 다른 인종이나 민족이 왜 열등한지에 대한 다양한 연구결과들이 나왔습니다. 또한 종종 원인과 결과를 바꿔서 해석하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약탈로 인해 존엄성을 잃고 끔찍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이 그렇게 밖에 생활하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들이니 자신들의 지배가 정당하다는 식이지요.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이 성경에 부합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주장을 부정하면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태도를 보이곤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성경 문구들을 도구로 쓴 그의 주장은, 성경이 아닌 사회풍조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주장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일은, 세상의 원리를 주관하는 존재보다도 사회풍조와 자기 자신을 더 높이 두는 일입니다. 이것이 자기와 타인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비극들을 우리는 지켜봐 왔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더 높이 두는 것을 불경이라고 하며, 불경이 초래하는 불행을 보면 왜 불경을 가장 큰 죄라고 하는지도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의 주장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사실에 대해 그가 보이는 태도가 어떠한 지를 보면, 그의 주장이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에 기반한 것인지, 사회풍조에 기반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여성혐오에 대한 사실 관계를 예를 들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낚시가 물고기를 낚는 것과 사람을 속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처럼, 혐오란 용어도 다른 두 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혐오감을 일으키는 대상에 대한 개인적인 혐오감을 뜻하며, 다른 하나는 인종혐오와 같은 사회구조적인 혐오를 뜻합니다. 여자를 좋아한다는 개인 감정과 별도로, 편견과 차별이 존재하는 것은 사회구조적인 여성혐오가 원인입니다. 한편으로, 개인적인 혐오감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예를들자면 뱀 자체에 대한 혐오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뱀자체에 갖는 혐오감은 아니지만, 모든 뱀이 독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뱀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성혐오 사회 때문에, 남성자체에 대한 혐오가 아니더라도 남성에 대한 개인적 혐오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런 개인적인 혐오감은 선재하는 여성혐오 사회가 원인임에도, 마치 남성 자체에 대한 혐오감을 조장하고 있어서 이런 혐오가 생겨난다는 식의 주장을 하곤 합니다. 이는 여성혐오를 하는 사람에게나 자연스러운 논리일 뿐, 사실에 부합하지는 주장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사회구조적 혐오인 여성혐오와 개인적 혐오감인 남성 혐오는 애초에 다른 혐오의 개념이므로 대립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동등한 반대 개념으로써 대립되고 있는 것처럼 꾸미는 사회풍조가 있습니다. 이처럼 사실 관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가 아니라 단순히 자신이 익숙한 사회풍조를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문화가 만든 우상이 오히려 진실을 대체하는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인권의식의 향상으로 동성애자 인권에 대한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권의식이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와 동일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인권의식 또한 일종의 사회풍조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권이 참 인권입니다. 차별 당하게 된 이들의 위치에 함께 하는 것은 성경적인 것입니다만, 그것은 성경을 피해자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와 같이 동성애와 관련된 성경 해석의 문제 또한 동성애에 대한 사회 분위기 또는 동정심에 편승해서 이뤄지는 작업이 아닙니다. 다만 기존 사회풍조에서의 가치판단이 아니라 사실이 무엇인지를 점검할 필요성은 있습니다. 밝혀진 사실들은, 성경이 제멋대로 해석되지 않고 온전한 빛을 비추도록 이 시대에 주어진 선물입니다.


어떤 이들은 문자 그대로 동성애자의 존재와 성경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태도는 성경이 혐오를 담은 책이라고 모함하기 위해서도 쓰여지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구절들이 사실과 상충되지 않는다면 성경에 쓰여진 것은 차별이나 혐오가 아닙니다. 성경을 지은 분이 세상을 지은 분이라면, 성경이 담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입장은, 동성애에 대한 사실과 상충될 수 없습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성경에서 언급한 것은 동성애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 주장을 하기위해서 시대상황을 얘기하고 원어를 해석하며 그럴 듯한 설명을 붙이지만 그것이 성경 전체의 의도를 벗어나기도 합니다. 그럴 경우 자의적인 해석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어떤 주장이 사회풍조나 자의적 해석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세상의 사실과 더불어 성경의 사실을 왜곡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창조섭리와 동성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창세기 1:27-28)


지상명령이라고 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받았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한 창조 디자인이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창조 디자인에 의거하여 판단하면 쉽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생육하고 번성하는 창조 디자인과 상관없이 성관계를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임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이나, 사고로 생식기능을 잃은 사람들 입니다. 다른 예로는, 여성의 질에 어떤 손상이 있어서 부부관계를 항문으로 하는 부부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이들의 성과 그들의 관계가, 둘이 서로 한 몸이 되는 하나님의 계획과는 상관없는 정욕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들은 평생 성관계는 갖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생육을 위해 이혼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성별이분법의 질서 안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간성(intersexual)이 있습니다. 이들은 선천적으로 여성도 남성도 아닌 육체로 태어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저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류를 통한 신의 계획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누군가와 결혼하는 것은 창조질서에 위배되는 것일까요? 

자위행위의 경우 오로지 쾌락만을 목적으로 성을 사용하고 있는 행위입니다. 피임기구 역시 인간문명이 최근에야 발명한 것으로, 어떤 관점에선 정상적인 관계와 잉태의 흐름을 역행하는 일입니다. 창조 디자인과는 다른 행위입니다. 인간의 의도로 자연스런 디자인을 정확하게 역행하는 일입니다. 이에 대한 판단이나 태도는 어떤가요?

이러한 사례들에서 우리는 창조 디자인과 관련된 판단에서도 어떠한 사회문화의 가치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음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소수의 사례에서는 판단이 단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충분히 존중되고 고려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과정 없이 가지게 된 확신의 느낌은,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사회풍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신이 계획한 디자인대로의 완전성에서 벗어난 것이, 개념적인 원죄의 개념일 뿐, 실제의 죄라고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탈모는 창조 디자인에 부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계획한 완전성이 아닙니다. 이 역시 인간의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창조디자인과 달리 변화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발이식이야말로 창조디자인을 회복하는 일이며, 회개이며, 주님을 위해 노력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오드아이도 마찬가지 입니다. 같은 색깔 칼라렌즈를 껴서 죄를 극복하야 하는 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런 일들과 이 땅에서 창조 디자인으로 회복하는 일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창조 디자인의 완전성에 부합하지 않는 모습들은, 개념적인 의미의 죄일 뿐, 그 현상이 개인의 죄가 되진 않습니다. 이 땅에서 완전성에 대한 기준이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해 볼 수 있습니다. 자기 기준의 완전함을 신의 의도와 대체하여 판단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혼용 속에는 어떠한 사회문화의 가치판단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동성애에 대한 수용은, 창조섭리를 혼란시키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실이 밝혀지고 그러한 사실 관계가 정리된 것에 따른 결과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사람(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이쉬’(남자)와 ‘이샤’(여자)로 창조되었는데, 이를 단순히 육체적 성별이분법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이 자웅동체라는 결론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창조 디자인은 사랑에 의거한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참고 : 성경과 성별이분법 http://entolre.tistory.com/266). 단순히 육체적인 성별이분법을 자체를 말하는 것고 있다는 확신은, 사실은 어떤 사회문화적 가치판단이 개입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동성애자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지향은 내가 그렇게 되고 싶다고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성애자들도 원한다면 임신을 할 수도 있으며, 양자를 들일 수도 있습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류의 생육과 번영에 기여합니다. 동성애자가 난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이 이뤄지거나, 정자와 정자가 만나서 수정이 이뤄지게 하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불임이나 간성과 마찬가지입니다. GMO나 핵과 같이 인간이 만들어내어 섭리대로의 균형을 파괴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대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별의 문제에 있어서, 동성애를 대표로 하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이해는 성차별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구조적인 불합리를 타파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습니다. 성차별의 사회가 아니라 여성이 진정한 자신으로서, 남성이 진정한 자신으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사회입니다.

곧 동성애자가 사람에게 계획된 섭리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판단은 부당한 편견이며, 이러한 편견이 작동하도록 작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문화적 가치판단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현대 사회의 인권의식이 “동성애는 성경적으로 죄가 아니다”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회의 풍조가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인 해석을 좌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문화를 따르는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폭력성이 높은 성격의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물론 그 자체로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재림 후, 그의 폭력성이 사라지는 것인지, 세상에서 폭력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지는 것일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과 상관없이 죄는 죄입니다. 누군가 폭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건 죄입니다. 폭력성이 높은 성격을 가졌다고 폭력이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성경적 사실에 부합하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동성애의 존재 자체와 그에 비롯된 행위에 대해서 판단하기 위해서는 다음을 검토해 봐야 합니다.


1) 동성애는 정욕과 같이 사람이 선택하는 범죄인가?


2) 성경에서는 동성애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우선 동성애가 정욕과 같은 죄라면 기독교인은 이를 가치중립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일을 지지할 수 없습니다. 동성애와 관련된 사실을 점검한다면 이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앞으로 5~8장을 통해 이를 다룰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경이 동성애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에 따라, 기독교인은 사회의 인권의식과 다른 판단이더라도 그에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성경의 구절들을 고찰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9~14장에서는 이를 다루도록 할 것입니다.

 

성경의 뜻을 밝힐 때, 자기본위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가 마음에 드는 성경해석을 쫓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사실을 검토해야 합니다. 성경을 계획하신 이의 의도라면 그분이 창조한 세상의 진실과 대치될 수는 없습니다.



4. 동성애와 후천성의 문제


현대사회는 성소수자에 대한 가장 많은 진실을 알게 된 사회입니다. 이중 동성애에 관련된 이슈는 성소수자에 관련된 주된 이슈이긴 하지만, 여러 이슈 중 일부일 뿐이기도 합니다(*참고 : 성소수자 속 동성애의 위치 이해하기 http://entolre.tistory.com/213). '성소수자 =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기록된 것은 남성 간의 성관계에 관한 언급이며, 이 글의 목적이 성경적인 분별이기 때문에, 주된 논의는 동성애를 중심으로 이끌고 가게 되었습니다. 


동성애에 관련된 유전자가 있더라도 동성 사이에서는 자손이 생기지 않으므로 결국 없어졌을 것이라며 동성애는 선천적일 수 없고 학습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관련된 유전자를 밝혀내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유전자와 관련된 일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닙니다. 성격에 관련된 유전자만 해도 밝혀진 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요.

동성 간 성관계는 인간 이외의 동물들에게서도 꾸준히 발견되고 있으며, 따라서 단순히 학습한 것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동물에서 나타나는 동성 간 성관계는 영장류에서 뿐 아니라, 다른 포유류, 조류나 곤충에 이르기까지 성을 가진 동물 전반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동물행동 연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1999년까지의 연구에서만 해도 무려 470종 이상의 종에서 동성 간 성관계가 보고되었었는데, 2006년에는 1천 500여종에서 보고되면서, 동물에서 동성 간 성관계는 점점 보편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랑과 성행위가 같은 개념이 아닌 것처럼 동성애와 동성 간 성행위가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동성 간 성관계를 보이는 종들이 동성에게 끌림을 느끼는 성지향, 곧 동성애가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동물들이 창조섭리를 역행하기 위해서 동성 간 성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듯, 인간에게 동성애가 나타나는 것은 생물학적 현상, 곧 배워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동성애가 특별히 도덕적 문란으로 증가한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동성애가 문란함을 증가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전자적으로 내재된 확률의 문제는 도덕의 타락에 따라 더 높은 확률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건전하다고 그 유전자적 확률이 줄어들거나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동성애는 동성 간 성관계와 동일한 개념이 아니며, 단지 동성애 대한 성지향입니다. 일반적인 성지향인 이성애가 성적으로 문란한 사회라면 마찬가지로 동성애도 문란할 뿐입니다. 동성애가 사회의 문란함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문란함이 동성애에 반영되는 것입니다. 동성 간 성관계가 많은 것과 동성애자가 많은 것은 다른 개념입니다.


몇몇 동성애자들에게서는 어렸을 때의 외로움이나 정신적인 충격이나 성폭행 등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이를 보고 동성애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후천적인 영향이 있었다는 것이 고쳐야 하는 문제라는 것과 동일한 개념은 아닙니다. 어쩌면 어렸을 때 발생한 사건 때문에 단지 더 빨리 자신의 성지향을 회복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동성애자의 비율이 더 많은 나라를 두고 후천적인 판단 또한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 나라에는 동성애와 관련된 유전자 풀(gene pool)이 많을 수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억압이 없는 환경에서 현 인류에서 나타날 수 있는 동성애자의 비율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동성애라는 성지향이 결정되는 것이 100% 선천적으로만 결정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100% 후천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후천적인 영향이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인지할 수 있어야 사실에 부합하는 판단이 될 수 있습니다.
동성애 혐오가 드러나는 사회에서 어떤 정신적 충격없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가정에서, 다른 성소수자와 대면하지 않고서도, 본인의 성지향이 동성애임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정하려고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이지요. 곧, 동성애 혐오의 사회 속에서 '후천적'이라는 뜻은, 동성애를 후천적으로 배운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래의 성지향이 차별에 의해 억압되는 경우를 뜻합니다. 그런 경우 동성애의 성지향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부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동성애에 대한 선천적, 곧 유전적인 요소가 있다는 말이 가치중립적이라는 뜻인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이기심같은 어떤 기질을 갖는 것 또한 유전적인 문제이기도 하며, 곧 생물학적 현상입니다. 그러나 이 이기심 자체는 도덕적으로 악한 것입니다.
동성애가 생물학적 현상이더라도, 만약 성경에 동성애가 악한 것으로 써 있다면 성경적으로 동성애는 악입니다. 성경을 주신 존재가 세상을 지은 존재라면 그 둘은 상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만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 동성애 자체라기보다 '악한 동성 간 성관계'라면 그건 동성애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동성애가 아니라 '악한 동성 간 성관계'를 말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악한 이성 간 성관계'가 나옵니다. 그것과 이성애가 동일한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악에 대한 문제에 인과관계를 혼동해선 안됩니다.

동성애에 대한 판단은 문화적 가치에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동성애가 부정적인 문화가 있고 아닌 문화가 있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인 판단에 있어서, 사회풍조에 근거하여 성경 구절을 역으로 해석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인과관계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지동설은 신성모독이다 = 성경이 말하는 것이 천동설이기 때문이다”라는 오류는 성경 문자 그대로를 사용해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사실과는 맞지 않습니다. 천동설의 사회풍조에 근거해 인과관계를 혼동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회풍조 속에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성경해석에 영향을 미칩니다. 주장의 정당성을 분별하기 위해 먼저 지동설에 대한 사실을 정리해 온 것 처럼, 동성애와 관련된 사실을 정리해보는 지금의 작업이 필요합니다.



5. 동성애와 치료의 문제


우리는 동성애가 고쳐졌다는 사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례가 존재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한 사례가 무엇인지는 성소수자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알게 된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성애적 관계를 갖던 사람 중에서도 이성과의 결혼생활이 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동성애가 고쳐진 사례라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양성애자나 범성애자라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양성애자라고해서 남성과 여성에 똑같이 끌림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한쪽 성에 대해서는 그 끌림이 약할 수 있습니다. 호모플렉서블(homoflexible, 대체로 동성에게 끌림을 느끼는 경우) 또는 헤테로플렉서블(heteroflexible, 대체로 이성에게 끌림을 느끼는 경우) 등의 경우가 있습니다.

애초에 성정체성 자체가 변하도록 태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플루이드 섹슈얼(fluid sexual)은 살면서 성지향이 한번 이상 바뀌는 경우입니다. 일생 동안 한 번 변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여러 번 변하도록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변하는 시기도 각기 다르고, 여러 번 변하는 사람의 경우 그 주기도 여러 가지입니다.

동성애자가 노력한다고 양성애자가 되거나 이성애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성애자가 노력한다고 그렇게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배운다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애가 조절한다고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성지향을 조절 가능하도록 태어난 사람이 있다고 해서 동성애 혹은 이성애가 치료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가 양성애자나 범성애자 임에도 동성에 대한 끌림을 부정하는 것은 그가 치료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성지향을 말하는 것이 위험할 정도로 동성애에 대한 차별이 사회에 만연한 것뿐입니다.


높은 연령대일수록 동성애자의 비율이 낮다는 조사결과도 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과 억압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주위의 억압 때문에 원래 그의 자연스러운 성지향인 동성애의 성향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고연령대에서 동성애자의 비율이 낮다면, 그 시대의 사회적 억압이 더 컸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혹은 최악의 경우 사회의 차별이 자살을 부르며, 그의 성지향이 밝혀지지 않은 채로 죽어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동성애가 치료가 가능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동성애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지향을 발견하는 일은 오히려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동성애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동성애에 대한 차별 때문에, 그 본연의 성지향이 부당하게 억압될 수밖에 없던 사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억압에 대한 개인의 반응도 다릅니다. 사회적 억압이 큰 환경에서 자랐어도 동성애라는 정체성이 억압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사회적으로 그다지 큰 억압이 없더라도 동성애의 정체성이 억압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억압이 치유가 아닙니다. 오히려 억압은 그의 정상상태가 아닙니다.  


플루이드 섹슈얼과 같이 동성애의 성지향을 가졌다가 이성애의 성지향을 가지게 되는 경우는 분명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 모든 사람이 플루이드 섹슈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탈동성애'라는 표현은 사실에 부합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플루이드 섹슈얼인지, 호모플렉서블인지, 헤테로플렉서블인지를 구분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스스로 탈동성애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야 말로, 자기 본연의 정체성을 뒤틀어버려 스스로 영혼을 갉아먹게 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건강하게 자기 성지향을 정체화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를 살립니다.

이성애자에서 동성애자가 된 사람이 있다고 모든 이성애가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동성애 치료'라는 것은 혐오하는 사회풍조에 근거하는 표현입니다.


물론 일반적인 확률로 나타나는 성지향은 이성애입니다. 그렇다고 확률이 적으니까 동성애가 정신이상이나 이상성애라는 뜻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과 고쳐야 하는 것은 동일한 개념이 아닙니다. 간성이나 오드아이인 사람이 그들 그대로이며 창조질서를 위협하지 않듯, 동성애자도 그러합니다. 그들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잘못된 존재도 아니며, 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수정이 이뤄지는 법칙이 흔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풍조로 성경의 뜻을 왜곡하면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인권의식 또한 사회풍조일 수 있습니다. 인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만든 세상의 사실과 상충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 사실에 근거하는 가치야말로 성경의 본래 의미를 밝혀줄 것입니다.



6. 동성애와 질병의 문제


항문성교는 대표적으로 동성애의 문제라고 제시되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 항문성교는 변실금을 높이며 에이즈의 확률을 높인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항문성교를 하는 남성 동성애자 중에서 변실금이 나타나는 건 사실입니다.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성 이성애자 중에서도 변실금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남성 동성애자 사이에 더 높은 확률로 변실금이 나타난다는 연구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각주:1]. 마찬가지로 항문성교를 하는 남성 동성애자와, 그렇지 않은 남성 이성애자 사이에 변실금이 발생할 확률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연구도 있습니다[각주:2].

항문성교가 성병의 원인이라는 논리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피임기구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 성병의 확률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남성 동성애자 사이의 에이즈가 더 많은 건 사실입니다. 동성애자 사이의 성병의 확률이 높은 것은 항문성교 때문이 아니라 피임기구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피임기구를 사용하지 않는 관계가 에이즈 확률을 높입니다. 그렇다고 "동성애 = 피임기구를 사용하지 않게 하는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남성동성애자들이 항문성교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부 남성 동성애자들이 동성애를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동성애자와 항문성교자는 동일한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앞서 들었던 사례처럼 질이 손상을 입어서 항문성교를 하는 이성애자 부부를 생각해봅시다. 변실금의 확률은 본질이 아닙니다. 항문성교와 동성애는 각자가 개별적인 개념입니다.


물론 남성 동성애자의 HIV감염인의 비율이 높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항문성교라고 해도 피임기구를 사용하면 감염확률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님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오히려 동성애자들이 사회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뜻합니다. 이를 두고 동성애가 죄라는 해석이 대표적으로 인과관계를 뒤집어 생각하는 혐오에 기인한 판단입니다. 일본이 하나님을 잘 믿어서 경제가 부강하고 장수하는 것이 아니며, 아프리카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믿음의 정도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동성애자 사이의 감염확률도 그들이 사회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내몰렸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일 뿐입니다. 혐오와 차별이 그들을 건강하지 못한 관계 속으로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 연구된 사실은 동성애자 사이의 에이즈 비율을 높이는 것이 동성애 자체라기 보다, 동성애 혐오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동성애와 에이즈의 관계에 대한 진실 http://gmoon.tistory.com/283?category=602077).

그럼에도 에이즈를 거론하며 동성애 자체를 비난하는 사회풍조가 있다는 것은, 그 사회에 동성애 혐오가 있으며, 혐오가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평균 청소년 자살률보다 동성애자 청소년 자살률은 월등히 높습니다. 한국의 동성애자 청소년 중 절반 가까이가 자살을 시도할 정도입니다[각주:3]. 이 역시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이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과관계를 뒤집어서 동성애가 에이즈를 퍼뜨리고 자살로 몰아간다고 하는 주장은 이미 존재하는 차별에 혐오를 더하는 행위입니다.

단순히 HIV 감염비율로만 보자면, 이성애자 보다 여성 동성애자가 더 적은 비율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여성 동성애가 이성애보다 더 건전한 관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동성애는 건전하지 않다 = 왜냐하면 이성애가 건전한 것이기 때문이다"는 것은 오류입니다. 누군가의 성지향은 그에게 건전한 것일 뿐입니다. 성지향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성애가 건전하듯, 동성애도 건전합니다. 동성애가 건전한 것이 이성애가 건전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순환의 오류는 사실이 아닙니다.


성지향의 측면에서 사실 관계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성경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한지에 대해 판단해봐야 합니다. 다만 여기서 동성애가 위험한 것이라는 자기신념이 성경을 해석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동성애혐오가 역으로 성경에서 규정하는 악의 문제를 해석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인권의식과 관련된 자기신념 역시도 성경을 해석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사실에 부합하는 판단이 무엇인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판단은, 세상을 만들고 성경을 주신 이의 의도에 부합할 것입니다.



7. 동성애와 가정


동성애에서는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성관계를 통해 서로의 관계를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따라서 많은 동성애자들이 가정을 꿈꿉니다. 성지향이 동성을 향할 뿐, 이성애자와 동일합니다. 그와는 달리 책임이나 진정한 관계와 상관없는 성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욕은 이성애자 사이에서도 존재합니다. 정욕과 동성애는 동일한 개념이 아닙니다.

동성애자들도 아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인공수정을 할 수 있습니다. 한쪽이 불임인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성애자들은 양자를 들일 수도 있습니다. 동성애자가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지도 않으며, 그들이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추구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동성애가 이상한 것이라는 사회문화가 있기도 하며, 동성애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사회 문화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동성애 자체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동성애를 이상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가 있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들이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기 힘든 것은 애초에 그들의 관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동성애자 부부의 건강한 가정이 존재합니다. 동성애자들의 관계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기 힘든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들이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기 힘들도록 만드는 사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동성애자 부부는 이성애자 부부의 가족 구조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동성애자 부부의 존재 때문에 이성애자 가정이 와해될 여지는 없습니다. 만약 한 쪽의 성만 있는 것이 이상하다면, 우리는 편부모가정은 정상적이지 않으니 자식을 키우면 안된다고 하지 않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동성애자 부모를 두었다고 하여 이성애자 자녀가 혼란을 겪는 일은 없습니다. 그는 그에게 내재된 유전적 특성과 조건에 따라 자연스러운 성정체성을 갖습니다. 어떤 성지향이 악한 것인지 아닌 지는 가치의 문제입니다. 어떤 성지향을 악하다고 판단하는 가치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자연스러운 성정체성을 갖는 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 둘은 다른 개념입니다.

이성애자 부모를 둔 동성애자 자녀의 경우에 부모가 자녀의 성지향이나 성정체성을 받아들일 때는 혼란이 없으나, 부모가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혼란을 겪을 수 있습니다(http://lgbtpride.tistory.com/799).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가정에 불행을 초래하는 것은 동성애 자체보다는 외부의 요소입니다. 동성애자 가정을 힘들게 만드는 건 동성애가 원인이 아니라 혐오가 원인입니다.


동성애가 단순한 정욕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성애에서도 성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책임지는 부부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 사실과 부합합니다. 성지향이 이성이냐 동성이냐에 따라 이성애자 부부가 되고 동성애자 부부가 됩니다. 

물론 그렇더라도 성경에서 동성애에 대해 명확히 죄로 규정하고 있다면, 기독교적인 가치가 무엇인지는 명확해질 것입니다. 다만 그와는 별도로, 비기독교인이면 결혼도하면 안되고 자식을 가져서도 안된다는 식의 주장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주장이 하나님의 정의를 지키는 방식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 식의 주장을 동성애자 부부에게 쏟아내고 있다면, 그건 하나님의 정의를 지키는 방식이 아닙니다.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혐오입니다. 혐오에 근거한 성경의 해석은 올바른 해석이 될 수 없습니다.



8. 동성 간 관계의 다양성


우린 앞서서 동성애가 치유되는 것이라는 생각은 대표적인 편견의 산물임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지금은 동성애의 범위로 규정하기 애매한 경우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동성애는 이성애, 양성애, 무성애 등 다양한 성지향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성적끌림을 느끼지 않는 무성애자 중에서는 연애감정은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중에는 동성에 대해 연애감정을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동성로멘틱 무성애자라고 하며, 성적인 끌림은 없지만 동성에게 연애감정을 느끼는 경우입니다. 이들은 동성애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적인 끌림을 느끼는 성과 성적인 끌림을 느끼는 성이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남녀의 육체관계를 갖는 것을 좋아하지만, 정신적인 사랑은 동성에게만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편 육체의 성과 정신적 성이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여자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남자인 사람이, 동성인 남자를 좋아하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이 경우 남자로서 남자와 관계를 맺는 것인데, 드러나는 육체로는 여성과 남성 간의 관계처럼 보여 집니다.

이러한 다양한 사례들은 정신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들은 어떤 정신병 같은 증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도록 태어나는 현상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서 동성애라는 것은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런지요.


이성애자라고 하더라도 동성애적 기질이 100%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작동할지 않을 정도로 이성애적 기질이 강할 뿐입니다. 또한 그 정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사람들의 성격이 제각각이듯 이성애적 기질과 동성애적 기질의 비율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이성애적 성향이 좀 더 강하게 나타나긴 해도, 동성애적 성향 역시도 어느 정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동성애로 규정하기 애매한 경우가 아니라, 동성애가 아닌데 동성애로 오해를 받는 사례들도 흔합니다. 특히나 동성 간 성추행 같은 범죄에 있어서 그런 오해가 쉽게 나타납니다. 예를들어 군대내에 동성 간 성추행이 동성애자들이 일으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2003년 실시한 '군대내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군대 내 남성간 성폭행에 대한 조사 사례 중 가해자가 동성애자인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고 나타나기도 했으며 오히려 가해자들은 자신이 동성애자로 취급받는 것이 억울하다며 강한 동성애혐오증을 보였다고 합니다[각주:4]


동성 간 성행위와 동성애는 다른 개념입니다. 동성애자가 아니라도 동성 간 성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기형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종종 나타나기도 합니다. 동성애자가 아니나 쾌락을 위해 동성 간 성관계를 갖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동성애로 규정하기 애매한 경우가 아니라 절대 동성애와 같지 않은 사례들입니다. 이러한 사례들과 동성애를 혼동하는 것은 편견과 차별에 기인하는 사회풍조일 뿐입니다.


동성애는 성소수자 중 하나입니다. 다른 성소수자인 간성의 경우에는 남성의 생식기관과 여성의 생식기관이 둘 다 있을 수 있습니다. 생식기관으로 이들은 여성과의 관계나 남성과의 관계  모두에서 생기기관으로서의 동성애자가 됩니다. 간성 중에는 XY염색체를 가지고 있지만 생기기와 젠더 모두 여성인 경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여성의 몸을 가지고 스스로 여성으로 생각하나 유전자적 측면의 동성애자가 됩니다. 반면에 성소수자 중 하나인 트렌스젠더의 경우 동성을 좋아더라도 유전자적으로는 동성애가 아니게 됩니다.

동성애라고 하면서 각자가 만든 동성애에 대한 어떤 특정한 상을 두고 생각하려 하지만, 동성애는 바로 그런 성소수자의 개념 속에서, 사실에 부합하여 이해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동성애에 대한 사실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는 동성애를 지지한다는 가치판단과 상관없는, 사실에 대한 정리일 뿐입니다. 사실을 점검하는 것은 성경을 온전히 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는 사회풍조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사회풍조가 역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하더라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를 구분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에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가 있어 성경 자체의 본래 뜻을 분별하도록 돕습니다. 그 지혜는 시대에 허락된 사실과 충돌되지 않습니다. 이에 따라 동성애와 관련된 사실들을 먼저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사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아서, 마치 천동설과 같이 동성애 혐오의 사회풍조를 통해 성경을 곡해하게 되는 일을 경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그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성경 속에서 동성애와 관련되는 것으로 고려되고 있는 구절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9. 창세기 19:4-8과 동성애의 관계


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돔 성 각 마을에서,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쌌다. 그들은 롯에게 소리쳤다.


"오늘 밤에 너의 집에 온 그 남자들이 어디에 있느냐? 그들을 우리에게로 데리고 나오너라.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 하겠다."


롯은 그 남자들을 만나려고 바깥으로 나가서는, 뒤로 문을 걸어 잠그고, 그들을 타일렀다.


"여보게, 제발 이러지들 말게. 이건 악한 짓일세. 이것 보게, 나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이 있네. 그 아이들을 자네들에게 줄 터이니, 그 아이들을 자네들 좋을 대로 하게. 그러나 이 남자들은 나의 집에 보호받으러 온 손님들이니까,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게." (창세기 19:4-8)

 

마을 모든 남자가 외부에서 온 남성과의 관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문자 그대로 마을의 모든 남자는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상당한 무리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는 도무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동성애에서의 성관계도 당연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관계입니다. 성적 끌림이 동성을 향할 뿐이니, 이성애와 다르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입니다. 동성애에서도 성관계는 양쪽의 깊은 유대감이 진행되고 나서 서로에 대한 책임을 전제하에 이뤄지게 됩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이성애자는 동성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습니다. 유전자적 확률상으로도, 당연히 마을의 모든 남성이 이성애자가 아닐 수는 없습니다. 본문의 상황은 사실 동성애라는 틀에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곧 위의 사례는 동성애와 일치할 수 없습니다.

위의 상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시대와 당시 사회에 대한 고려 없이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본문의 상황은 단순히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것과도 다른 상황이며, 동성애와는 더더욱 다른 형태입니다.


위의 상황은 소돔이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합니다. 소돔은 성적으로 문란한 사회였으며, 여기서 유래된 sodomy란 단어는 종종 동성 간 성관계를 말하고자 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며, 그 외에 항문성교, 수간 등의 비일반적 성관계나 이상성애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sodomy란 단어가 동성 간 성행위가 만연했던 소돔에서 유래되었다고 해서, 위의 상황이 동성애와 동일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소돔에서 만연했던 동성 간 성관계를 동성애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도 오류입니다. 소돔이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할 때, 그것은 성적으로 문란한 상황을 말하는 것이지 그것이 본문의 상황 그대로를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위와 같은 장면을 들어 동성애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논리도 맞지 않을 뿐더러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조장하는 일입니다. 이성애의 결과가 문란한 성관계나 난교가 아니듯이 동성애의 결과가 문란한 동성 간 성관계나 집단 성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소돔의 상황과 sodomy란 단어에서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끌어내는 일은, 혐오하는 사회풍조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렇게 거짓 개념을 전파하는 것 역시도 사회풍조를 성경의 권위보다 위에 두는 일입니다.


한편 롯은 남자손님대신 처녀인 두 딸들을 내어준다고 얘기합니다. 정말로 딸을 내어 준다면 간음의 현장을 만드는 것이며 이는 죄에 해당할 것입니다. 실제로 롯은 딸을 내어주지는 않습니다. 저는 롯이 던진 메시지는 책임 있는 관계를 가지라는 경고가 아니었을까 판단합니다. 롯은 성관계는 가정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은 당시에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적어도 동성애 자체가 건강하지 않은, 곧 악한 관계라는 것은 위의 구절만으로는 근거가 부족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구절이 “동성애는 성경적으로 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도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위 구절 자체로는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과 동성애와 관련된 사실이 무엇인지를 짚어볼 수 있었습니다.



10. 레위기 18장, 20장과 동성애의 관계


레위기 18장과 20장의 내용은 매우 유사해서, 18장은 성관계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으나 자기 아이를 몰렉에게 제물로 바치는 행위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20장은 처음에 몰렉에게 아이를 바치는 내용을 배치하고 강조하긴 했지만, 이후에는 성관계에 관한 율법을 주로 다룹니다. 여기서 성관계에 대한 내용으로는 근친상간과 관련된 다양한 사례들, 간통에 해당하는 것들, 남자 간 성관계, 수간 등이 언급됩니다.


이 중 남자 간 성관계에 대한 구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여자와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안 된다. 그것은 망측한 짓이다. (레 18:22)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이므로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죄값으로 죽는 것이다. (레 20:13)


인권을 지지하는 진영에서 종종 성경을 자기본위로 해석할 경우가 있습니다. 

위의 구절이 "남성 간 성관계를 말하지 여성 간 성관계는 말하지 않으므로 동성애는 아닐 것이다"라는 주장 등이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시대적 정황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쓰여진 고대 중동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나타난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양한 남성우월주의 사회 안에서, 여성 간의 성관계는 존재하지도 않거나 매우 천한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남성 간의 성관계는 이성애보다도 오히려 더 정신적인 것이며, 우월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남색이라는 단어 자체가 남성 중심적 단어입니다. 남색이란 것이 남자간의 성관계를 말하지만, 여색이란 것이 여성간의 성관계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철저히 남성만을 주체로 보고 있습니다. 여성에 대해서는 성관계를 언급할 수 없었습니다. 성관계는 남자가 하는 것으로 여성은 주체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하게 말해 여성 간 성관계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 시대에서는 성관계는 남자가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을 고려했을 때 남성을 주체로 언급한 일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그 사회에서는 남성의 동성 간 성관계를 기술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성의 동성애는 다룬 것이 아니니 비논리적이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동성애가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위 성경 구절에서 동성 간 성관계는 망측한 짓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성애는 성지향으로서의 동성애 기질 자체를 정죄할 수는 없다. 다만 동성 간 성관계는 망측한 것이니 참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남성 동성애자가 항문성교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동성 간 성관계와 동성애가 동일한 개념인 것도 아닙니다. 또한 동성애로 분류하기 애매한 경우도 있습니다. 간성의 경우 무엇이 동성애가 되는 것입니까? 이 모든 상황에서 성관계를 참으면 완벽하게 정리되는 것입니까? 

사실에 부합하는 해석이 필요합니다. 천동설의 시대에도 지동설의 증거들이 사실을 이끌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본문 앞에서, 우리는 당시 세계관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을 동시에 마주하고 있습니다. 사실에 부합하는 해석을 찾아가는 작업에 대해, 동성애자들을 옹호하기 위해 성경을 자기본위로 해석하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면,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 마음인지를 점검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천동설의 시대에는 지동설을 주장하면 사형에 처했으며, 성경에 해가 움직인다는 구절들은 비유가 아니라 천동설이라고 주장되었었습니다. 반면에 시대적 정황을 고려하는 것은 예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시대적 정황을 고려한다는 것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를들어 구약에서는 육신의 할례에 대해 문자 그대로 새겨놓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육신의 할례에 대해 구약과는 다른 적용을 합니다. 그래서 구약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거나, 성경은 모순적이어서 신뢰할 수 없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적 정황을 고려했을 때, 구약과 신약은 예수님 안에서 충돌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위의 구절은 종종 우상숭배의 제의적인 의미로 읽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적인 관계에 관련하여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흥미롭게 정리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성경적으로 성관계는 곧 서로에 대한 평생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당시 성경이 쓰여진 사회에서 남성 간 성관계는 그러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나 그때에나 정욕에 근거한 남성 간의 성관계가 존재한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그 시대의 동성애자들이 책임에서 자유로운 성관계를 원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시대에는 동성애자라고해도 책임 있는 관계를 맺고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사회적인 요건이 되지 않았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성애가 받아들여졌던 고대사회라고 하더라도 그 둘이 가정을 이루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사회적 혼란을 주는 성관계 혹은 정욕에 근거하는 성관계의 목록에서 남성 간 성관계가 존재하는 일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사실 비단 그런 예전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금도 사실 동성애와 동성간 성관계가 다르다는 것이 충분히 인식되지 못하고 있고, 간성을 비롯한 성소수자의 사례들도 충분히 인식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지향인 동성애로 정리할 수 없는 모든 부분을 혼동하여 뒤섞어 생각합니다. 


위 본문이 명백히 동성애를 지시하는 것이라고 느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간성 등 성소수자와 관련하여 밝혀진 사실을 통해, 단순히 섹스를 참으면 된다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는 지점들이 밝혀졌습니다. 해가 움직인다는 성경 구절이 지동설을 설명하지 못하듯, 성소수자와 관련된 사실들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물론 정황만을 가지고서  "성경이 동성애를 죄라고 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다만 할례에서의 경우와 같이, 명백히 보이는 문자 그대로가 답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살인, 간음, 도둑질 등과 같이 문자 그대로의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위 본문이 할례와 같은 시대적 상황의 문제인지, 동성애 자체가 다른 죄와 마찬가지의 죄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분별이 필요합니다.

다만 문자 그대로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애초에 동성애를 살인, 간음, 도둑질과 같은 일로 바라보는 혐오의 안경을 쓰고, 성경을 역으로 그렇게 해석하게 된 것은 아닌지 체크해 보아야 합니다. 육체적 할례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 시대적 정황에 역행하여 어떻게 성경 자체의 빛을 가리고 교회를 찢었는지에 대한 일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지 않는다면, 밝혀진 사실과 시대적 정황에서 충돌되지 않는 해석으로 답이 제시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느낌에 명확하다는 것은 내 느낌을 섬기는 일입니다. 내가 서 있던 것이 성경이 아니라 사실은 사회풍조였다면 끔찍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우상 숭배의 결과가 무엇인지는 감춰지지 않습니다. 앞서서 동성애에 대한 사실을 살펴보고, 사실 관계가 무엇인지 살펴 봤습니다. 왜곡되지 않는 진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11. 사사기 19:22-25과 동성애의 관계


그들이 한참 즐겁게 쉬고 있을 때에, 그 성읍의 불량한 남자들이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싸고, 문을 두드리며, 집 주인인 노인에게 소리질렀다.


"노인의 집에 들어온 그 남자를 끌어내시오. 우리가 그 사람하고 관계를 좀 해야겠소."


그러자 주인 노인이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보시오, 젊은이들, 제발 이러지 마시오. 이 사람은 우리 집에 온 손님이니, 그에게 악한 일을 하지 마시오. 제발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마시오. 여기 처녀인 내 딸과 그 사람의 첩을 내가 끌어내다 줄 터이니, 그들을 데리고 가서 당신들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이 남자에게만은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마시오."


그러나 그 불량배들은 노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레위 사람은 자기 첩을 밖으로 내보내어 그 남자들에게 주었다. 그러자 그 남자들이 밤새도록 그 여자를 윤간하여 욕보인 뒤에, 새벽에 동이 틀 때에야 놓아 주었다. (사사기 19:22-25)


사사기에서는 앞서 소돔에서와 비슷한 일화가 언급됩니다. 처녀인 딸을 언급하는 내용도 비슷합니다. 남자를 내놓으라고 했던 이들이 동성애자 였다면 성적 끌림을 느끼지 못할 여성을 상대로 윤간을 벌이는 것을 봐도, 이것이 동성애로는 전혀 설명되지 못한다는 점도 비슷합니다.

비슷한 예를 다시 언급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위와 같은 일화를 보며 동성애는 죄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성경을 읽을 때 인과관계를 뒤집어서 생각하는 경우가 반복된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제사 의식에서 남성 간 성행위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그냥 남성 간 성행위가 제사 의식에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냥 그런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것과 동성애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동성애 때문에 죄를 짓게 된 게 아닙니다.

고대사회에서는 남창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창녀가 존재한다고 이성 간의 사랑과 성관계 자체가 죄가 아니듯이, 남창이 존재한다고 동성애와 동성 간 성관계가 죄라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창녀의 존재가 이성애 때문이 아닙니다. 남창의 존재가 동성애 때문이 아닙니다.

인과관계를 뒤집을 수 있는 논리는 혐오를 배경으로 합니다.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하는 사회풍조를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들은 창조섭리를 반대하지 않으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에 함께한다는 것은 앞서 설명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해석은 자기 판단으로서가 아니라 성경 자체가 주체가 되어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로 읽어야 한다는 것도 앞서 설명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한 행위가 동성애와 동일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느낌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느낌으로는 동성애와 죄성이 연결되었다고 느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애초에 많은 이성애자들이 동성과의 성관계에 대해 본능적으로 가지는 거부감이 있습니다. 성경 단어로 표현하자면 ‘토에바(תּועבה)’, 곧 ‘가증한 것’ 혹은 ‘역겨운 것’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본능적으로 그런 거부감을 가지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성지향입니다. 그것은 동성애자가 동성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지향일 뿐입니다. 어떤 동성애자들에겐 이성애의 성관계가 마찬가지의 본능적 거부감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자기 느낌이 성경에 대체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동성애가 죄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런 느낌을 심어준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성지향일 뿐입니다. 이성애자들이 그런 성향을 가진다는 것과 동성애가 죄라는 것은 동일한 개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읽은 느낌이 성경 자체의 뜻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때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되기도 합니다. 인종이나 성별에 따른 존재적 우열이 있다는 걸 성경이 지지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혐오하는 사회풍조를 기반으로 합니다. 인종이나 여성에게 열등함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하지 않은 혐오와 차별이 있는 곳에 억울한 이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성경의 의도는 자기 느낌이나 사회풍조가 아니라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와 함께 합니다.



12. 로마서 1:26-27과 동성애의 관계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 속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 (로마서 1:26-27)


위의 구절을 보면 정욕이 바르지 않은 동성 간 성관계를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이는 언뜻보면 동성애는 자연스런 성지향이 아니라 정욕과 다름 없는 것으로 보이게도 합니다. 그러나 성지향이 정욕에 기반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성지향을 가졌더라도 정욕에 기반한 행위를 할 수 있을 뿐이지요. 정욕에 기반한 동성 간 성관계가 있다는 사실과, 동성애가 정욕이라는 것은 다른 말입니다.


밝혀진 사실은, 분명 현대에서도 정욕이 바르지 않은 동성 간 성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사례로 보스턴 지역의 가톨릭 사제들 가운데 약 90명(약 6%)에 달하는 이들이 아동성추행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영화 <스포트라인트> 인데, 왜 여성 아동보다 남성 아동을 선호하게 되는지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보스턴 지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고려했을 때 "성경은 정욕에 의해 바르지 않은 동성 간 성관계가 발생하는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과 부합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사례로 군대내 성추행과 관련된 사례도 있습니다. 이 성추행의 가해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동성애자로 오해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오히려 동성애자들이었다면 이 혐오의 사회에서 추행을 통해 자신의 성지향을 대놓고 드러낼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곧 동성애가 아닌 다른 요소가 군대 내 성추행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밖에도 동성애자가 아님에도 여자복장을 한 남자나 트렌스젠더와 성관계를 갖는 것에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이상성애에 해당하는 것으로 동성애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정욕이 바르지 않은 동성 간 성관계를 만들어내는 사례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과 동성애가 동일하다는 것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현대사회에서도 남녀 간에 바른 관계가 있는 반면, 그와 달리 정욕에 따르는 바르지 않은 관계가 있습니다. 강간이나 간음이 이성애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이성 간 성행위가 존재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정욕을 따르며 강간이나 간음을 한 것일 뿐입니다. 바르지 않은 동성 간 성관계가 동성애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동성 간 성관계가 자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바르지 않은 정욕을 따르는 이들이 바르지 못한 동성 간 성관계를 가진 것뿐입니다.


이성애자 중에서도 성중독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동성애자 중에서도 그러한 사람이 나타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음성적인 일이 흔한 이성애자들 사회에 비해 동성애자들의 사회는 좀 더 좁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데 더 조심스러운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존재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은 육체의 확인을 촉발시키기도 하고, 차별에 의해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관계만이 허용되기도 합니다. 이는 동성애라는 성지향이 태생적으로 문란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의 사회가 그들의 자연스러움을 억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원인은 동성애가 아니라 혐오와 차별입니다.


위의 본문이 동성애 자체를 정욕이라고 말한다는 해석은, 사실의 문제에 부합되는 해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직관적으로 그런 식으로 해석하게 만들고, 오히려 사실에 부합하는 해석을 자의적 해석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 바로 혐오입니다.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기듯 혐오의 안경을 성경의 권위 위에 두는 것입니다.


유독 동성애자들에게 쏟아지는 편협함과 잔인함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정당성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나 차별을 담은 그들의 주장이 사실인 것이 아니라, 혐오의 사회풍조가 그만큼 근본적으로 뿌리내려 있다는 판단이 사실에 부합합니다. 깊게 뿌리내린 어떤 사회풍조는 스스로가 그것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쉽게 분별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느낌이 아닌 사실을 검토하는 작업이 유효합니다. 위의 구절을 보면서 동성애는 정욕과 동일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이 주체가 아니라 자기 느낌을 주장하기 위해 성경을 단지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인과관계를 뒤집에서 생각하는 것은 주어지는 지혜에 기반하지 아니하고 혐오의 사회풍조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3. 고린도전서 6:9-10과 동성애의 관계


불의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나, 술 취하는 사람들이나, 남을 중상하는 사람들이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9-10)


신약에 등장하는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각각의 원어는 arsenokoitai와 malakoi 입니다. 직역하자면 arsenokoitai는 '침대 위의 남자', malakoi는 '부드러운 남자' 정도의 뜻입니다.

전자는 동성 간 성관계를 하는 이(abusers of themselves with mankind, KJV)를, 후자는 이를 받아들이는 이(effeminate, KJV)를 말하는데, 이는 나이 든 남자가 미동을 사서 관계를 갖는 것이 횡행했던 고대 헬라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분명히 이와 같이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행위, 돈으로 남창을 사는 행위 모두 동성애자들 사이에서도 분명히 죄악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행위와 사랑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동성애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여러 역본 중 NASB판에서는 'arsenokoitai'라는 단어를 'homosexuals(동성애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일부 해석만이 성경을 올바로 보고 있는 것이고 다르게 해석한 역본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틴 루터의 시대에서도 확인된 것처럼 오랫동안 이 단어는 '자위행위를 하는 자'라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가 되어서 자위행위는 보편화되었고, 해당 당어는 남색을 뜻하는 단어로 전환되게 됩니다. 물론 단어의 번역이 바뀌는 것은 더 합당한 번역을 찾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에 따라 진정한 뜻을 밝혀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지금의 번역이 지고지순하게 완벽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해당단어가 자위행위자에서 동성애자로 바뀌는 시기에서는 동성애와 부적절한 동성간 성관계가 구분이 되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현재도 성지향으로서의 동성애와는 관련없는 동성 간 성관계를 동성애라는 단어로 이해하는 사람이 공존하기도 합니다. 지금도 단순한 정욕에 근거하는 남성간 성관계나 범죄에 해당하는 남성간 성관계가 벌어집니다만, 그것은 동성애 자체가 단순한 정욕이나 범죄라는 뜻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차별의 사회 풍조 때문에 '동성간 성관계에 관련된 범죄자'와 '동성애자'를 혼동하는 언어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예전에 '자위행위자'로 믿었던 단어를 이제는 일부 역본에서 '동성애자'로 바꾸었으며, 이것을 두고 동성애 자체가 악행이라고 규정하는 것이(앞서 논의했듯 창조 디자인과 다른 것과 악행은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신의 뜻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분명해지는 것은 우리가 '문자 그대로'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에 대한 문제제기 입니다. 어느 것이 ‘문자 그대로’인 것인지요. 돈으로 미동을 사는 사람들일까요?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일까요? 단순히 동성 간 성관계가 아니라 항문성교를 하는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자위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자기가 속해있는 사회문화에 소속되어 성경의 문자를 보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마주하게 됩니다. 


현재에도 해가 움직인다는 구절이 있으니 천동설이 맞다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여전히 문자 그대로 여성차별과 노예제가 맞다고 해석할 수 있는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가치관 위에 정교하고 성스러워 보이는 바벨탑 같은 논리를 세울 수 있습니다. 천동설을 주장했던 이들도, 인종차별이나 여성차별을 주장했던 이들도, 자신들이야 말로 성경 그대로를 믿으며, 자신들과 다른 생각은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상대를 자유주의라거나 근본주의라고 낙인찍으면 마치 자신이 성경을 수호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그 느낌이야 말로 바벨탑 같은 것이며 사실은 그렇게 하는 자신을 높이는 일입니다. 우리가 성경으로 말할 수 있는 주장은 오직 복음뿐입니다.


arsenokoitai라는 원어마저도 단어일 뿐이며 그 단어 자체가 진정한 본 뜻의 주인은 아닙니다. 그 본 뜻의 주인은 세상을 지은 존재시며, 그는 인간이 만들어가는 시대를 초월하여 그 본 뜻을 알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성경의 진정한 뜻은 시대의 지혜와 함께 합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주인은 우리가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알도록 인도합니다. 그래서 주어지는 것이 그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의 빛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때에 맞춰 주어진 지혜와 상충되지 않습니다. 



14. 디모데전서 1:9-10과 동성애의 관계


율법이 제정된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라, 법을 어기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와, 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않은 자와, 속된 자와, 아비를 살해하는 자와, 어미를 살해하는 자와, 살인자와, 간음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사람을 유괴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를 하는 자와, 그 밖에도,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훈에 배치되는 일 때문임을 우리는 압니다. (디모데전서 19:1-10)


고린도전서와 마찬가지로 남색이 언급됩니다. 이 남색이라는 개념은 homosexual이라는 개념과도 완벽히 일치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동성 간의 성범죄가 동성 간의 성행위 자체와 같은 개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 간 성범죄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이성 간 성행위 자체와 동일한 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동성 간 성행위와 동성애 역시도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위 본문이 뜻하고자 하는 바는, 악행의 목록 중에 남성 간 성관계에 관련된 악행도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을 두고 선후관계를 따지는 작업을 "동성애를 옹호하기 위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거나 "이론을 성경보다 높이 둔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논리는 지동설을 핍박할 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오히려 사실을 따지는 작업은 성경의 진정한 원작자의 뜻을 아는 일입니다. 그가 만든 세상의 법과 성경의 법이 상충되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자 그대로 성경구절에 남성의 짧은 머리와 관련된 규례에 대해서는, 시대에 따른 분석과 적용을 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동성 간 성범죄가 아니라 동성애 자체가 죄라고 해석는 일에 있어서는, 동성애가 죄이기 때문이라는 순환오류로 빠집니다. 법과 관련된 순환 오류도 있습니다. 동성 간 결혼이 법적으로 지지받지 못한다고해서 그것이 악행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차별적 적용에 대해 주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동성애가 죄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차별과 편견에 젖어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이기적인 것은 도덕적으로도 악한 것이듯, 동성애가 악한 것이여야 동성애가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간성을 악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피임기구의 사용을 악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동성애가 다르게 적용될 수 없습니다.

명백하다고 느껴지는 나의 느낌에 부합하는 해석이 아니라 사실 관계를 살펴봤을 때, 성경에 동성애와 관련되었다고 주장되어지는 많은 구절들은, 동성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에 대한 편견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라는 판단이 사실과 부합합니다. 성경에 동성애를 말하는 구절이 많은 것이 아니라, 개인 신념에 의해 성경에 써있는 것이 동성애라고 판단하고 싶은 구절이 많다는 게 좀 더 사실에 부합하는 분석입니다.


성경이 '부적절한 정욕에 의한 동성 간 성관계' 뿐만 아니라 '동성애'에 대해서도 죄라고 말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자기 느낌처럼 명확한 일이 아닙니다. 마치 지동설의 지식이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던 처럼,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금도, 정욕에 의한 동성간 성관계와 성지향으로서의 동성애를 제대로 구분할 수 없던 시대의 용어로서 이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느낌은 그 둘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혼동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그보다는 사실에 부합하는 판단을 해야 합니다. 사실에 부합한다는 것은 사회풍조를 따르는 것과 명백히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이 주체가 되게 하는 일입니다.

"명백히 동성애를 죄라고 한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동성애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렇게 주장하는 그가 동성애와 관련된 사실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그가 동성애에 대한 사실관계에 반하는 논리를 펼친다면, 그의 주장은 사회풍조를 따른 판단일 확률이 높습니다. 자기가 해석하는 구절을 들이미는 것은 성경이 아닌 자기 권위일 확률이 높습니다.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이는 사실과 대치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동성애와 관련된 사실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저로써는 성경에 등장하는 표현들이 동성애와 같은 개념이라고 하기에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점이 많은 바, 이것이 동성애 자체를 말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그런 저의 주장 뿐 아니라 모든 주장은 자의적인 해석이 될 여지가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나의 충분한 능력과 자격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입니다. 이와같이 나의 판단이, 주님이 주시는 지혜를 따르고 있던 것인지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 역시도 주님께서 밝히 보여주십니다. 마지막으로는 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15. 성경과 나의 온전한 관계


성경에서 등장하는 남색은 죄로 분류됩니다. 동성애는 그러한 남색과는 다른 특성을 보이며, 현대의 동성애에서도 성경에 등장하는 남색과 같은 경우는 당연하게도 죄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남색이 아닌 동성애를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여전히 다양한 시선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동성애가 아닌 우상숭배의 제사의식이나 고대의 불평등한 관계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남색을 대표적으로 표현했을 뿐 동성애 자체를 죄로 규정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성관계를 쾌락의 도구로 이용하고, 상대를 물질화 하는 일이라면 죄라는 메시지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해석들도 결국에는 모두 사람의 해석일 뿐입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 온전합니다. 성경은 그 자신이 주체입니다. 사람의 해석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단지 사람은 시대에 허용된 지혜를 받아서, 거기에 반응하며, 성경과 관계를 맺어 가는 것입니다. 

내 주장이 어떻다는 것을 논리로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본 성경으로 내가 믿는 것을 주장하면, 그것은 사실 자기주장일 뿐입니다. 내가 얼마나 완벽한 논리를 가지고 있는 지는 생각보다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자기의 바탕에서 서로 침범할 수 없는 완벽한 논리를 세울 수 있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논리가 다른 논리에 굴복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가 주님에게 굴복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과 온전한 관계 속에 있다는 건 내가 가진 논리, 내의 해석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나의 부족함마저 완전함으로 사용하십니다.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를 통해 갖게 된 생각이라면, 그것은 사람을 살립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진정으로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를 통해 얻은 것이라면, 그것이 어떤 주장이더라도 얘기를 전달받은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는 데 전혀 지장이 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나의 해석으로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며, 성경 자체가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판단을 넘어 때에 맞는 말을 하게 되고, 때에 맞는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성경에 나오는 문자 대로의 말이어서 사랑으로 그를 살리려고 전했던 말인데 동성애자들이 그것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쩌면 그 동성애자의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내 느낌대로, 내 주변의 풍조에 따라 성경을 보고는, 성경을 이용해서 나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나의 정의에 대한 사랑이었지, 예수니므이 사랑이 아니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상대방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주님은 밝히 보여주시기에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살립니다. 말씀은 살아있어 골수를 쪼갭니다.

내가 성경과 온전한 관계에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오히려 내가 성경의 빛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에 있는 경우에는 "나는 너를 살리려고 하는 것이다"는 것을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가 "이 사람은 나를 살리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세상에 증명해 줍니다. 이는 성경에도 나오는 이야기처럼 예수를 믿기에 구별된 삶을 사람들을 보며 주변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불러준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 삶입니다.

그저 착하게 살아서가 아닙니다.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성경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16. 예수님은 그곳으로 가서 함께 우신다


성경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성경은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내가 진정으로 사람을 살린다고 주장하는 것은 생각처럼 의미 있는 일은 아닙니다. 내 해석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 속에서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셨습니다.


내가 어쩌면 자기주장을 했던 것인지,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올바로 성경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지는 어쩌면 그리 구분하기 어려운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바로 내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이뤄지는 세상의 변화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선포하고 있는데, 나와 같은 진영에 있는 사람들의 내부의 결속력만 다지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타락한 세상의 핍박 속에서 정의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단순히 자기가 속해있는 사회풍조 속에서 자기본위대로 성경을 읽으며 자기를 높일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그와는 전혀 다릅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선포하니 그 주변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단순히 불쌍한 사람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과 동일한 마음이 되어 그들의 고통으로 함께 마음이 찢어지는 것도 핵심적인 표징입니다. 그렇기에 치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치유의 관계 안에서 그들 뿐만 아니라 바로 내가 회복 됩니다. 그렇게 서로 회복이 되어 갑니다. 그렇게 성경은 주체입니다. 성경은 빛입니다.


동성애 논란에서 진정한 핵심은, 내가 얼마나 성경을 잘 해석하고 있는지, 혹은 내가 세상 정의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가 아닙니다.

진정한 핵심은, 내가 정말 동성애자들과 삶 속에서, 생활 속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지, 나는 정말 동성애자들의 고통을 동일하게 느끼고 있는지 입니다.

진정한 시대의 지혜는 단순히 판단을 내리고 있는 자리에 있지 아니합니다. 바로 생활 속에서 삶을 함께 하는 그 자리에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러하셨습니다.


어둠은 실체가 아닙니다. 어둠은 빛이 들어오면 사라집니다.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타협할 필요없이 어둠인 세상에 침투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눈물이 있는 곳, 아픔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세요. 밖에서 자기 판단의 옳고 그름을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은 고민한다고 어둠이 될 수 없습니다. 눈물이 있는 곳으로 내가 가는 것입니다. 함께 눈물 흘리면서 함께 빛을 불러옵니다. 단순히 시장바닥에서 혼합되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눈물이 있는 그 안으로 함께 생활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권력 있는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가장 의미 없는 일입니다. 동성애자들의 고통에 침묵하며 살아가는 다수의 동의를 얻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에게 똑같은 놈들이라는 취급을 받더라도 죄인이라고 낙인 찍힌 사람, 바로 그 사람, 울분 속에서 힘든 삶을 살게된 억울한 이들, 그들과 함께 하나가 되고, 서로가 위로가 되고, 그것이 주변으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침묵하고 있던 다수에게 까지 영향력이 미치는 것입니다. 성경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1. Miles, A. J. G., Allen-Mersh, T. G., & Wastell, C. (1993). Effect of anoreceptive intercourse on anorectal function. Journal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 86(3), 144-147. [본문으로]
  2. Chun, A. B., Rose, S., Mitrani, C., Silvestre, A. J., & Wald, A. (1997). Anal sphincter structure and function in homosexual males engaging in anoreceptive intercourse. The American journal of gastroenterology, 92(3), 465-468. [본문으로]
  3. 강병철, 하경희. (2005). 청소년 동성애자의 동성애 관련 특성이 자살 위험성에 미치는 영향. 청소년학연구, 12(3), 267-289. [본문으로]
  4. http://thel.mt.co.kr/newsView.html?no=201603101239826429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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