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창세기 1:27-28)


지상명령이라고 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받았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한 창조 디자인이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창조 디자인에 의거하여 판단하면 쉽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생육하고 번성하는 창조 디자인과 상관없이 성관계를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임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이나, 사고로 생식기능을 잃은 사람들 입니다. 다른 예로는, 여성의 질에 어떤 손상이 있어서 부부관계를 항문으로 하는 부부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이들의 성과 그들의 관계가, 둘이 서로 한 몸이 되는 하나님의 계획과는 상관없는 정욕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들은 평생 성관계는 갖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생육을 위해 이혼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성별이분법의 질서 안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간성(intersexual)이 있습니다. 이들은 선천적으로 여성도 남성도 아닌 육체로 태어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저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류를 통한 신의 계획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누군가와 결혼하는 것은 창조질서에 위배되는 것일까요? 

자위행위의 경우 오로지 쾌락만을 목적으로 성을 사용하고 있는 행위입니다. 피임기구 역시 인간문명이 최근에야 발명한 것으로, 어떤 관점에선 정상적인 관계와 잉태의 흐름을 역행하는 일입니다. 창조 디자인과는 다른 행위입니다. 인간의 의도로 자연스런 디자인을 정확하게 역행하는 일입니다. 이에 대한 판단이나 태도는 어떤가요?

이러한 사례들에서 우리는 창조 디자인과 관련된 판단에서도 어떠한 사회문화의 가치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음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소수의 사례에서는 판단이 단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충분히 존중되고 고려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과정 없이 가지게 된 확신의 느낌은,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사회풍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신이 계획한 디자인대로의 완전성에서 벗어난 것이, 개념적인 원죄의 개념일 뿐, 실제의 죄라고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탈모는 창조 디자인에 부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계획한 완전성이 아닙니다. 이 역시 인간의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창조디자인과 달리 변화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발이식이야말로 창조디자인을 회복하는 일이며, 회개이며, 주님을 위해 노력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오드아이도 마찬가지 입니다. 같은 색깔 칼라렌즈를 껴서 죄를 극복하야 하는 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런 일들과 이 땅에서 창조 디자인으로 회복하는 일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창조 디자인의 완전성에 부합하지 않는 모습들은, 개념적인 의미의 죄일 뿐, 그 현상이 개인의 죄가 되진 않습니다. 이 땅에서 완전성에 대한 기준이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해 볼 수 있습니다. 자기 기준의 완전함을 신의 의도와 대체하여 판단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혼용 속에는 어떠한 사회문화의 가치판단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동성애에 대한 수용은, 창조섭리를 혼란시키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실이 밝혀지고 그러한 사실 관계가 정리된 것에 따른 결과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사람(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이쉬’(남자)와 ‘이샤’(여자)로 창조되었는데, 이를 단순히 육체적 성별이분법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이 자웅동체라는 결론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창조 디자인은 사랑에 의거한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참고 : 성경과 성별이분법 http://entolre.tistory.com/266). 단순히 육체적인 성별이분법을 자체를 말하는 것고 있다는 확신은, 사실은 어떤 사회문화적 가치판단이 개입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동성애자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지향은 내가 그렇게 되고 싶다고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성애자들도 원한다면 임신을 할 수도 있으며, 양자를 들일 수도 있습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류의 생육과 번영에 기여합니다. 동성애자가 난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이 이뤄지거나, 정자와 정자가 만나서 수정이 이뤄지게 하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불임이나 간성과 마찬가지입니다. GMO나 핵과 같이 인간이 만들어내어 섭리대로의 균형을 파괴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대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별의 문제에 있어서, 동성애를 대표로 하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이해는 성차별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구조적인 불합리를 타파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습니다. 성차별의 사회가 아니라 여성이 진정한 자신으로서, 남성이 진정한 자신으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사회입니다.

곧 동성애자가 사람에게 계획된 섭리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판단은 부당한 편견이며, 이러한 편견이 작동하도록 작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문화적 가치판단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현대 사회의 인권의식이 “동성애는 성경적으로 죄가 아니다”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회의 풍조가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인 해석을 좌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문화를 따르는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폭력성이 높은 성격의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물론 그 자체로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재림 후, 그의 폭력성이 사라지는 것인지, 세상에서 폭력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지는 것일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과 상관없이 죄는 죄입니다. 누군가 폭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건 죄입니다. 폭력성이 높은 성격을 가졌다고 폭력이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성경적 사실에 부합하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동성애의 존재 자체와 그에 비롯된 행위에 대해서 판단하기 위해서는 다음을 검토해 봐야 합니다.


1) 동성애는 정욕과 같이 사람이 선택하는 범죄인가?


2) 성경에서는 동성애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우선 동성애가 정욕과 같은 죄라면 기독교인은 이를 가치중립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일을 지지할 수 없습니다. 동성애와 관련된 사실을 점검한다면 이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앞으로 5~8장을 통해 이를 다룰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경이 동성애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에 따라, 기독교인은 사회의 인권의식과 다른 판단이더라도 그에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성경의 구절들을 고찰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9~14장에서는 이를 다루도록 할 것입니다.

 

성경의 뜻을 밝힐 때, 자기본위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가 마음에 드는 성경해석을 쫓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사실을 검토해야 합니다. 성경을 계획하신 이의 의도라면 그분이 창조한 세상의 진실과 대치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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