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동성애가 고쳐졌다는 사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례가 존재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한 사례가 무엇인지는 성소수자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알게 된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성애적 관계를 갖던 사람 중에서도 이성과의 결혼생활이 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동성애가 고쳐진 사례라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양성애자나 범성애자라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양성애자라고해서 남성과 여성에 똑같이 끌림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한쪽 성에 대해서는 그 끌림이 약할 수 있습니다. 호모플렉서블(homoflexible, 대체로 동성에게 끌림을 느끼는 경우) 또는 헤테로플렉서블(heteroflexible, 대체로 이성에게 끌림을 느끼는 경우) 등의 경우가 있습니다.

애초에 성정체성 자체가 변하도록 태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플루이드 섹슈얼(fluid sexual)은 살면서 성지향이 한번 이상 바뀌는 경우입니다. 일생 동안 한 번 변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여러 번 변하도록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변하는 시기도 각기 다르고, 여러 번 변하는 사람의 경우 그 주기도 여러 가지입니다.

동성애자가 노력한다고 양성애자가 되거나 이성애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성애자가 노력한다고 그렇게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배운다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애가 조절한다고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성지향을 조절 가능하도록 태어난 사람이 있다고 해서 동성애 혹은 이성애가 치료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가 양성애자나 범성애자 임에도 동성에 대한 끌림을 부정하는 것은 그가 치료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성지향을 말하는 것이 위험할 정도로 동성애에 대한 차별이 사회에 만연한 것뿐입니다.


높은 연령대일수록 동성애자의 비율이 낮다는 조사결과도 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과 억압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주위의 억압 때문에 원래 그의 자연스러운 성지향인 동성애의 성향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고연령대에서 동성애자의 비율이 낮다면, 그 시대의 사회적 억압이 더 컸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혹은 최악의 경우 사회의 차별이 자살을 부르며, 그의 성지향이 밝혀지지 않은 채로 죽어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동성애가 치료가 가능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동성애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지향을 발견하는 일은 오히려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동성애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동성애에 대한 차별 때문에, 그 본연의 성지향이 부당하게 억압될 수밖에 없던 사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억압에 대한 개인의 반응도 다릅니다. 사회적 억압이 큰 환경에서 자랐어도 동성애라는 정체성이 억압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사회적으로 그다지 큰 억압이 없더라도 동성애의 정체성이 억압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억압이 치유가 아닙니다. 오히려 억압은 그의 정상상태가 아닙니다.  


플루이드 섹슈얼과 같이 동성애의 성지향을 가졌다가 이성애의 성지향을 가지게 되는 경우는 분명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 모든 사람이 플루이드 섹슈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탈동성애'라는 표현은 사실에 부합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플루이드 섹슈얼인지, 호모플렉서블인지, 헤테로플렉서블인지를 구분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스스로 탈동성애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야 말로, 자기 본연의 정체성을 뒤틀어버려 스스로 영혼을 갉아먹게 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건강하게 자기 성지향을 정체화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를 살립니다.

이성애자에서 동성애자가 된 사람이 있다고 모든 이성애가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동성애 치료'라는 것은 혐오하는 사회풍조에 근거하는 표현입니다.


물론 일반적인 확률로 나타나는 성지향은 이성애입니다. 그렇다고 확률이 적으니까 동성애가 정신이상이나 이상성애라는 뜻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과 고쳐야 하는 것은 동일한 개념이 아닙니다. 간성이나 오드아이인 사람이 그들 그대로이며 창조질서를 위협하지 않듯, 동성애자도 그러합니다. 그들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잘못된 존재도 아니며, 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수정이 이뤄지는 법칙이 흔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풍조로 성경의 뜻을 왜곡하면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인권의식 또한 사회풍조일 수 있습니다. 인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만든 세상의 사실과 상충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 사실에 근거하는 가치야말로 성경의 본래 의미를 밝혀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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