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으로 여성과 남성에 대한 문제를 설명한다는 개념과, 여성과 남성이 성경적이라는 개념은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몇몇 사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나누어보겠습니다.
  생육과 번성을 위해서 난자와 정자에 해당하는 짝이 있어야 하지만, 자웅동체에서도 이것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식물이 그러하고, 달팽이와 같은 동물 중에서도 자웅동체가 나타납니다. 이럴 때 생물학적으로 가장 근원적인 짝은 난자와 정자이지, 남성과 여성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태아의 성분화 과정을 보면 여성의 외성기와 유사한 모양에서 시작해서 남성의 성기가 만들어질때는 홈이 닫히면서 만들어집니다. 그냥 소박한 이해로만 본다면, 생물학적으로는 남성보다 여성이 먼저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성결정을 하는 것이 남성이 가진 Y염색체로 생각하기 쉬운데, 말이나 고양이는 수컷은 X 하나, 암컷은 XX입니다. 조류와 파충류는 그 반대로 수컷이 ZZ, 암컷이 Z 하나입니다. 누에와 같이, 암컷이 ZW, 수컷이 ZZ로 잉태하는 쪽이 사람의 Y에 해당하는 W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성이 XX와 XY로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자체에서 성경해석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을 수 있지만, 사실은 자기 신념에서 시작했던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천동설, 노예제, 여성차별 등을 통해 경험해왔습니다. 그럼 이제 성경으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창 1:27)

  창세기 1:27절은 문학적으로 세 개의 단위가 평행하고 있는데, 첫 두 평행구의 ‘하나님의 형상’은 세 번째 평행구의 남녀(짜카르 우네케바)에 상응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성에 대해, 하나님이 몸이 있으시다면 하나님은 남자일까요, 여자일까요, 아니면 둘 다 일까요? ‘짜카르 우네케바’를 ‘일체하는 파트너’의 개념이 아닌 ‘성기로 나뉘는 여성과 남성’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자웅동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 2:7에서는 ‘아다마’(흙)와 ‘아담’(사람)의 문학적 관계가 제시됩니다. 이후 ‘아담’(사람)은 ‘이쉬’(남자)와 ‘이샤’(여자)로 나뉘는데, 문학적으로 ‘아다마’와 ‘아담’의 짝 관계처럼, ‘이쉬’와 ‘이샤’가 짝 관계를 갖습니다. 여기까지도 이러한 짝이 남근과 자궁으로 나뉘는 개념으로 등장하진 않습니다. 어쩌면 타락 이전의 세상은 꽃과 같은 자웅동체였을 수도 있습니다.
  성역할에 대한 개념은 선악과 이후에 등장합니다. 여인의 ‘해산하는 고통’입니다. 창조 계획에서 이샤 = XX = 자궁이 된 게 아니라, 창조 계획을 벗어나고 나서 성역할의 개념이 등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앞 선 사례에서 재생산과 XX, XY가 동일한 것이 아님을 이야기했습니다. 곧 창조계획이 무엇인지는 성경자체가 아닌 우리의 신념이 작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자웅동체가 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성별 이분법 역시 창조 디자인을 따르는 것과 동일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인간의 육체를 여성과 남성으로 이분법한 계획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타락 후 벗어날 수밖에 없던 원래 계획 속에서도 자웅동체의 생물들을 남겨두어 태초의 비밀을 드러내셨을 수도 있습니다. 흔히 7일 창조로 이해되고 있는, 날에 해당하는 단어인 ‘옴’도 마찬가지로 24시간일수도 있고, 기간일수도 있고, 개념적 의미 일수도 있습니다. 이 중 어느 하나가 선택되고 나머지가 배제되어야 하나님의 창조 디자인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시 성경적으로 여성과 남성에 대한 문제를 설명한다는 개념과, 여성과 남성이 성경적이라는 개념은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것으로 돌아가 봅시다. 둘의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혐오입니다. 자기가 여자 좋아하는데 무슨 여성혐오냐고 말하는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미움은 사랑과 동시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혐오하면서 사랑할 수 없습니다. 혐오를 인식하지 못할 수 있고, 그 사랑은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만 우리는 소외되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도 함께 되뇝니다. 실재하는 현실을 인식하고 충분히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의 언어는 '빨갱이'와 같은 혐오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성별이분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성과 남성을 성경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반드시 성중립과 대치되는 것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차별이 제거된 세상에서는 억울한 눈물이 없을 것이며, 그 날에는 성경적으로 여성과 남성을 해석하는 시도도 재밌고 의미 있는 시도가 될 수 있겠지요. 그 나라를 막고 있는 것은 실재하는 혐오와 차별입니다. 성경 해석 자체가 성중립을 막고 있는 게 아니라, 혐오가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성별이분법이란 자기 신념을 기준으로 혐오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은 지상명령입니다. 이것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성소수자 파트너 가정 속에서도 원한다면 아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부부(夫婦)의 모습으로서 연장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성소수자 파트너들에게 법제적인 차원에서 결혼 제도로 인해서 발생하는 차별을 줄여야 하는 것은 성경적인 개념이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이 지상명령에 대한 판단에 있서는 싱글들 또는 불임인 사람들과 같이, 재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거나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 적용하는 것과 다른 잣대가 있어서는 안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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