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8:1-18
잔인하고 역겹다. 그것이 진실이다.
수 없이 빼앗고 빼앗고 빼앗았다는 비난하는 논조,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 세 줄 중에 두 줄을 죽여 공포로 굴복시키는 잔악성과 야비함,
병거를 끄는 말이라지만, 생명을 마치 도구처럼 짓밟는 행위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왕의 법은 군마를 많이 갖지 않는 것이나, 그것이 나머지 말을 병신으로 만들라는 건 아니다)
성경을 쓴 사람은 그 후손이다. 후손들은 다윗의 행위를 그렇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어떤 일본인이 선조들이 한국에게 한 일을 두고,
정신대로 여인들을 끌고 간 것, 무수한 학살과 말살을 말하는 일본인이 있다고 해보자.
그가 과연 '결국 일본이 잘사는 걸 보면 저건 잘한 거야'라고 말하는 것일까?
아니. 명백히 자기 선조의 죄를 인식하고 사죄의 마음으로 그 말을 남기는 것이다.
자기 선조의 과거사의 기록이니 어느 정도 편을 들거나, 중립적으로 쓰긴 하겠지만,
눈에 띄는 부덕한 일들은 대의를 위해 숨기는 게 아니라 콕 찝어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잔인하고 역겨운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우리들은 정의를 찾는다. 죄의 이유를 변명하려고 한다.
결국 "이 일의 결과로 정의가 세워졌다", "이 왕국에서 구원자가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결론은 '자신 안의 악과도 싸워야한다'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는 이와 같은 얘기다.
"과거 일본은 우리에게 만행을 저질렀지만 지금은 경제강국 아닌가.
지금은 이해하지 못해도 결국 일본이 우리에게 한 일들은 정의를 성취하기 위한 단계였다!"
아니다. '그래서' 정의가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가 이뤄진 것이다.
'하나'님의 방식은 그렇다. 가장 보잘 것 없고 천한 곳, 낮은 곳에서부터 일한다.
그렇게 더러운 곳에서도 정의가 죽지 않게 한다.
이것이 우선 깊게 박혀 있어야 진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인식하기가 어렵다.
이는 팔딱팔딱 살아있는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왜 일본은 과거의 만행을 부정하는가?
한편으로는 치졸하다 할 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살아서 자신을 찢으므로 힘들어서, 약해서, 뻔한 진실도 부정하는 것이다.
양심은 살아 있다. 다만 죄를 감당하기엔 힘들고 약하다.
그러니 학살에서도 정의의 명분을 찾으려고 가련하게 매달린다.
이쯤 물어보자. 너는 학살하지 않는가?
이 편한 생활, 멋진 옷들과 보석들, 세련된 주거 환경과 물건들, 산해진미들,
그 안에서 사람들의 피의 고혈, 역겨울 만큼 잔인하게 죽어 나가는 생명들,
그런 사회 구조를 향유하며 암묵적으로 죽음을 방조하거나 조장하는 사회이다.
남들 처럼 사는 건 죄가 아니다. 다만 사는 것 만으로도 학살이다.
우리는 죄를 인식하기가 어렵다.
솔직히 우리는 약하다.
그런 우리에게 잘못을 지적하면 우리는 더 아프다.
죄의 아픔을 알기 때문에 변명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지적을 하는 것은
결국 그런 나는 존재할 필요조차 없다고 느끼게 하는 잔혹한 일이다.
죄의 인식과 반성은 그런 것으로 이뤄질 수 없다.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받아주는 것이 먼저 있어야 한다.
내가 죄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이후에야 참된 반성이 이뤄질 수 있다.
사람들을 학살하는 일의 주어는 '다윗'이다. 하나님이 아니다.
학살을 두고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보았다는 구절은 없다.
그럼에도 승리는 다윗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차가 있다. 1000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다.
양갈래 길이 나왔다. 왼쪽 길은 막혀 있다. 그곳으로 가면 1000명이 죽는다.
오른쪽 길은 무고한 사람 한 명이 서 있다. 그를 치면서 기차는 멈출 수 있다.
당신이 기관사여서 길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길이든 죄는 벗아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없다.
내가 학살의 주인이 될 때, 우리는 죄를 인정 못하고 변명하게 된다.
솔직히 우리는 약하다. 감당할 힘을 가진 이 세상의 인간은 없다.
그러나 그 승리, 학살도 내가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하나'가 감당한다.
그건 책임을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하나'일 때 죄를 온전히 알 수 있다.
죄가 세상에서 어떻게 감당되는지, 그 빚이 무엇인지,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학살자에게서 어떻게 공평함과 의로움이 있을까?
아는가?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공평은 죄다. 빨갱이들의 짓이며 사회 말아먹는 짓이다.
진짜인 의로움은 고리타분하지만 좋은 선동 꺼리다. 기실은 힘을 가진 것이 곧 의로움이다.
그런데 어떻게 학살한 다윗에게는 공평함과 의로움이 가능한가?
다윗은 몸이 불편해서 일을 끝까지 다 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물건을 분배해준다.
그것은 물건이 스스로 가치가 있어서 그것을 약탈한 사람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 자체가 가치이기 때문이다.
물건의 주인, 건강의 주인, 지혜의 주인이 내 것,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고백이다.
마찬가지다. 물건을 따로 떼서 신에게 드린다며 물건을 묵히는 비효율적인 행위를 보자.
그러나 효율의 끝은 물질의 생산, 곧 소비의 사회와 생명의 물질화이다.
그것이 내가 주인이 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물건을 떼는 것에는 물건의 주인이 누구인지 안다는 지혜가 있다.
물건도 죄도 모두 '하나'안에 있다.
인간은 학살자이다.
불완전해서 욕심 많고 파괴적이고, 아닌척 시침떼는 모순 덩어리이다.
그런 것이 조화롭고 지속순환 가능한 존재를 목표로 한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말도 안되는 야망이라 할 지 모른다.
행성의 사멸은 우주에서는 평범한 일이다. 생명은 덧없다. 그러나 생명은 정열에 차 있다.
생명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주인이 당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