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청년단은 4.3사건 때 무고한 제주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학살했다.
당시 권력자들에게 대항하는 지식인들을 말살하고, 백성들을 굴종시키기 위함이었다.
자신들의 억울함을 얘기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 또 빨갱이니까. 그럼 죽는다. 아내와 어린 자식들 팽겨치는 행동이다. 아님 같이 죽게만들거나.
잘못한 건 지적한 사람이다. 그저 빨갱이란 단어만이 트라우마가 되어 억압된다.
정치권력의 잘못을 지적하는 거? 그건 모두를 망하게 하는 혐오스러운 행동이었다. 정치권력을 지적하는 행동은, 위정자들의 역겨운 행태보다도 더 증오스런 짓이었다.
거만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위정자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올바로 되길 원하는 말이 쉽게 나온다면, 어쩌면 내가 있던 자리는 단지 구경꾼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옳은 소리나 하고,
시위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언제나 그 자신은 올바른 것이다.
나 피해 보지 않는 옳은 판단이나 내리고 있는 자리가 아니라,
복수를 얘기할 수 있는 자리에 가 있어 보았는가?
그 자리는 내가 지키려는 자들에게도 멸시를 당하는 자리다.
내 소중한 것들을 내놓는 가장 책임없는 행동이란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정도로 안전하지 않아야, 사실은 내가 정치권력 앞에 서 있는 거다.
내가 얼마나 이성적이고, 정확한 사태파악을 하고 있는 지가 내가 어디에 있는 지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우는 곳이 내가 어디있는지를 말한다.
거기에 서 있을 때에 진짜 세상을 만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 진짜 세상을 만난 다음에 판단할 수 있다.
상황이 좋을 때야 다 좋은 사람이다.
아니다. 옆에서 누가 죽어나가든 기름지게 먹고 있어야, 심성도 고와지고 몸과 마음이 다 건강하며, 중도를 지키는, 더 좋은 계급의 사람이 된다.
더 좋은 계급에게 그 진짜 세상은 필요없다.
진짜 세상은 현실적인 것들을 망치고, 몸과 심성을 망치며, 자신과 주위 사람을 망친다.
그러나 진짜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가 좋은 계급일 때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 지에서 나타나지 아니하고, 진짜 세상에 있을 때 보여주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상황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그리고 살아가다보면 어쩌면 나쁠 때가 더 일반적인 상태임을 알게 되기도 한다.
다들 아는 식상한 문구.
미움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사랑만이 바꿀 수 있다.
내 탓이다. 모든 문제는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다.
이 참된 뜻의 깊이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정의가 없는 것은, 내가 세상의 기준이 맞고, 내 뜻대로 되는 것이 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명평화는 존재해 왔으며 영원하다.
내가 거기에 반응하는 만큼, 내 주변에 생명평화의 물꼬가 틀 뿐이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평화가 하는 것이다. 주체는 생명평화 자체이다.
생명평화라는 것이 어떤 아픔이고, 어떤 신비인지를 알지 못하기에, 단지 내 뜻대로 되지 못하는 것을 보며 정의가 없다고 한다.
시편 94:1-11
2015. 12. 14. 0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