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로지 그 자신이 행한 성실만큼만 풍요로워지는 곳이 생명의 세계다.

그러나 그 이외의 것이 이득을 가져올 때, 거기에는 약탈과 폭력성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단순한 거다. 그리고 그 사회는 죽음을 향해가는 문명을 세운다.


지금 세상은 어느 쪽에 와 있는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이 세계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노동과 평범한 이득이, 가난한 나라의 힘없는 이들의 고혈을 짜내고, 지구를 부양할 자연을 말려버리며, 온난화의 사실조차 무시한다.

세상은 어디로 가는가. 생명의 세계는 사라졌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우리는 두려움 밖에 남지 않았는가.


우리는 철학, 종교, 가치관으로 두려움을 마비시키곤 한다.

더 열심히 무언가를 추구하고, 죽음의 세상이 가진 벽에 부딪혀 버린다.

두려움을 속일 뿐 사라진 것이 아니다. 중독사회에 빠지고, 죄의식에 휩싸인다.


두려운 것은 그냥 두려운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생명을 바라보았냐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이니, 생명을 바라볼 때, 두려움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생명은 어떤 정당이 집권하는 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삶을 나누고, 걱정해주고, 눈물 흘리는 사람 옆에 서주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정권을 뒤집어야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세상을 살린 힘은 사실은 언제나 그 힘없어 보이는 인간스러움이었다.

예전부터 그래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이면서도, 마치 자신이 신이나 혹은 신의 대리인인 것처럼 한다. 세상의 옳고 그름을 자신이 잣대가 되어 판결을 내리곤 한다.

그러나 생명은 판결에 있지 않고, 묵묵히 투박하게 인간스러움을 따라가고 있는 그곳에 존재한다.

죽음문명의 것은 죽음에게 주어라. 우리는 사람이지 않은가.


나는 죽음문명, 사람들이 가진 죽음에 굴복하지 않겠다. 어차피 다 그렇고 그런게 인간이다. 굳이 그들이 가진 죽음을 비교하고 거기에 반응하면서 살 필요는 없는 것. 그런 삶은 기실 죽음을 기준으로 두는, 죽음을 주인으로 두는 삶이다.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판결하고 있으니 내가 주체라고 생각지만, 그 내면에 있는 것은 사실 죽음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삶이다.


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뻔한 죽음의 모습에 사로잡히지 않고 싶다.

사람들 안에 있는 인간스러움에 반응하면서 살고 싶다.

그것을 발견해 가고, 놀라워하고, 기뻐하겠다.

나의 사회생활도, 정치활동도 생명의 노래가 되게 하겠다.

생명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삶이고 싶다.


어쩌면 내 세대에 생태계의 파괴로 인해 인류의 마지막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연습하고 훈련한다.

인간스러움은 그 찬란함으로 영원하다.

'고요한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94:12-23  (0) 2015.12.15
시편 94:1-11  (0) 2015.12.14
시편 90편  (0) 2015.12.09
예레미아애가 5장  (0) 2015.12.08
예레미아애가 3장  (0) 2015.12.0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