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란 교리가 있다. 태초부터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성자에 해당하는 예수가 서례를 받고서야 성령이 함께 한 것으로 묘사한다. 이 땅으로 올때에 성령과 잠시 이별했던 것인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의 신은 그 시대의 법칙, 인간의 도를 따른 다는 것이다. 물질 세상과 분리되지 아니하고, 언어가 아닌 몸으로 답을 제시하는 것이 기독교 신의 특성이다.
신이 인간과 같아지는 장면을 바라보며, 이 시대에서 신과 같은 사람의 결과가 무엇인지 잠시 돌이켜본다.
그는 권력 논리의 희생양이 된다. 자신이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조롱당한다. 마녀사냥으로 가장 끔찍한 사형을 당한다.
신과 같으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이 시대이다.
그러나 그 결과 또한 이 시대에 존재하는 진짜 법칙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시대는 인간을 말살하려 하나, 인간은 시대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앞 서 있는 사람들을 따라서 사람다움을 펼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생각하는 능력을 기준으로 둔다. 신과 동일한 영, 신과 동일한 뿌리를 가졌다는 것은 개념일 뿐이다. 놀랍지도 신비하지도 않다. 다만 내가 가진 게 없어서, 모자라서 힘든 것이니 내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 시대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건 현실적 삶이다.
그러나 하나 되는 영을 바라보는 건 존재적 삶이다.
기독교에서 성령은 여러 명이라서 힘이 쎈 높은 성령과, 미약한 천한 성령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한 성령이라고 한다. 나와 함께 하는 성령은 신과 함께 성령과 동일하다.
내가 이미 가진 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일은 전혀 다르다.
우리의 육체는 신과 같은 곳에서 나왔다.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수억년 전 하나였다. 지금이란 것은 그 하나가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된 돌아오지 않는 작품이다.
신비는 그것이다.
마술 같은 것들, 휘황찬란한 물질과 권력은 현실일지 몰라도 진짜는 아니다. 진짜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면 모든 일은 달라진다.
이미 충분하다는 걸 알면, 이상하게도 하나 되는 여정을 위해 더 큰 능력과 더 큰 즐거움과 더 큰 인내심이 생길 것이다.
진정 성령이 무엇인가. 그 힘은 무엇인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이 명확하다 말하는 사람은 시대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신비를 바라보는 사람은 성령을 자랑하지 아니한다. 다만 하나 되는 여정으로 들어가 있을 뿐이다. 물론 그 여정이 무엇인지도 명확할 수 없다. 다만 그는 사람다워져 간다. 그것으로 성령이 시대 속에서도 자랑이 되게 한다.
기독교란 것은 자신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저 사람은 기독교인이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증명되게 사는 것이다.
여정.
지금 나에게 이르기 까지의 태초부터의 여정.
그것을 받아 오늘 내가 펼칠 여정을 바라본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성자에 해당하는 예수가 서례를 받고서야 성령이 함께 한 것으로 묘사한다. 이 땅으로 올때에 성령과 잠시 이별했던 것인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의 신은 그 시대의 법칙, 인간의 도를 따른 다는 것이다. 물질 세상과 분리되지 아니하고, 언어가 아닌 몸으로 답을 제시하는 것이 기독교 신의 특성이다.
신이 인간과 같아지는 장면을 바라보며, 이 시대에서 신과 같은 사람의 결과가 무엇인지 잠시 돌이켜본다.
그는 권력 논리의 희생양이 된다. 자신이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조롱당한다. 마녀사냥으로 가장 끔찍한 사형을 당한다.
신과 같으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이 시대이다.
그러나 그 결과 또한 이 시대에 존재하는 진짜 법칙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시대는 인간을 말살하려 하나, 인간은 시대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앞 서 있는 사람들을 따라서 사람다움을 펼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생각하는 능력을 기준으로 둔다. 신과 동일한 영, 신과 동일한 뿌리를 가졌다는 것은 개념일 뿐이다. 놀랍지도 신비하지도 않다. 다만 내가 가진 게 없어서, 모자라서 힘든 것이니 내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 시대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건 현실적 삶이다.
그러나 하나 되는 영을 바라보는 건 존재적 삶이다.
기독교에서 성령은 여러 명이라서 힘이 쎈 높은 성령과, 미약한 천한 성령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한 성령이라고 한다. 나와 함께 하는 성령은 신과 함께 성령과 동일하다.
내가 이미 가진 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일은 전혀 다르다.
우리의 육체는 신과 같은 곳에서 나왔다.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수억년 전 하나였다. 지금이란 것은 그 하나가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된 돌아오지 않는 작품이다.
신비는 그것이다.
마술 같은 것들, 휘황찬란한 물질과 권력은 현실일지 몰라도 진짜는 아니다. 진짜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면 모든 일은 달라진다.
이미 충분하다는 걸 알면, 이상하게도 하나 되는 여정을 위해 더 큰 능력과 더 큰 즐거움과 더 큰 인내심이 생길 것이다.
진정 성령이 무엇인가. 그 힘은 무엇인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이 명확하다 말하는 사람은 시대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신비를 바라보는 사람은 성령을 자랑하지 아니한다. 다만 하나 되는 여정으로 들어가 있을 뿐이다. 물론 그 여정이 무엇인지도 명확할 수 없다. 다만 그는 사람다워져 간다. 그것으로 성령이 시대 속에서도 자랑이 되게 한다.
기독교란 것은 자신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저 사람은 기독교인이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증명되게 사는 것이다.
여정.
지금 나에게 이르기 까지의 태초부터의 여정.
그것을 받아 오늘 내가 펼칠 여정을 바라본다.
'고요한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4:14-30 (0) | 2016.01.13 |
---|---|
누가복음 4:1-13 (0) | 2016.01.12 |
요 3:16, 요일 3:16 (0) | 2016.01.02 |
성탄절 (0) | 2015.12.25 |
시편 101편 (0) | 2015.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