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상황에서 남 탓 안하고 자기문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고, 그걸 못하는 건 그 사람 탓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거기에 그런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젊은 나이에 큰 깨달음을 얻은 스님이 있었다. 그는 어느 악랄한 대기업의 자녀였다. 그 악함을 깨닫고 속세의 연을 끊었다. 귀의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날 스님은 두 사람에게 부처님의 법을 설파하였다. 한 사람은 지혜를 얻었고, 그의 출신을 알고 더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사실 그는 그 대기업의 횡포에 의해, 회사가 부도나고 가정이 붕괴된 중소기업의 사장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아쉬울 것 없는 잘사는 집 자식이었기에 저런 삶도 가능해 보이는 것이었다.


우리는 쉽게 둘째 사람에게 돌을 던지곤 한다. 그러나 둘 중에 누가 더 지혜롭고 더 나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운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다. 둘째 사람도 자신이 원해서 그런 관계로 만난 것이 아니며, 원해서 그런 마음 상태가 된 것이 아니다. 드러난 현상은 둘째 사람이 틀린 것이다. 그러나 그 근본은 사실, 다름이다. 다름이라는 의미는 정말 깊은 것이다.


나 역시도 나보다 어린 사람이나, 악하거나 못나 보이는 사람의 말과 생각을 무시하곤 한다. 다름의 눈이 아닌 틀림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 가치관으로 보기에 어떤 악함을 가진 사람이라도, 모자라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안에는 신비가 있으며, 내면에서 선과 지혜의 말이 나온다. 물론 우리가 남을 판단하는 눈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오히려 판단의 마음을 믿지 않으면 될 일이다. 손해를 보는 것 같더라도, 다름 속에서도 오직 선함과 지혜의 말에만 반응해야 하는 일이다.


남에게 판단을 내리는 이유는 사실 나 자신을 그 자리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안의 악함과 어리석음을 변명하며 괜찮다고 여기거나 부정하곤 한다. 그때에는 자기 의를 내세우게 되어 버리며, 내면의 선함과 지혜는 알아차리기 어렵게 된다.


남을 판단의 눈으로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자기자신 또한 그 자리에 내버려두고 있었음을 깨달으면 된다. 변명할 필요는 없다. 나 역시도 운이 나빴을 뿐이다. 거기에 얽메이지 말고, 내면의 선함과 지혜를 찾아가기만 하면 된다.


내면의 선의지. 내가 찾은 것이 자기 의인지 아니면 내면의 선함과 지혜인지는, 오늘 나의 생활을 통해 알 수 있다. 찾은 것이 자기 의가 아니라 선과 지혜였다면, 내게는 오늘 다른 이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아픔이 덜어지는 자리 역시도 다른 이들의 아픔이 덜어지는 바로 그 시간, 바로 그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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