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를 사는 것과 현실을 사는 것은 조금 다르다.


현실을 사는 사람은 다음과 같다.

노숙인을 도와야 하지만 무분별한 도움은 오히려 독이다. 술이나 사먹고 상황만 더 악화된다. 그가 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진짜 돕는 것이다.

의사는 항상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므로 응급상황 이외에는, 더 나은 의료를 위해 주말에 쉬는 것이 결국 모두에게 더 이득이다. 다리 없이 지내온 사람에게 의족을 달아주는 일은 당장 응급한 일이 아니다. 주말에는 쉬고 내일 해도 되는 일이다. 당장은 의사도 돈을 벌고, 환자도 좋은 일로 보이나 이는 상도덕을 해치는 일이며,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실재를 사는 사람은 조금 다르다.

노숙인은 사회구조적인 피해자들이다. 그들이 더 나은 노숙을 위해 돕고, 그들 옆에 있어주는 것이 그들을 살린다.

다리 없이 지내온 사람에게 그 오늘은 얼마나 꿈꿔온 시간이었겠는가. 오늘 내가 만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쉬는 게 맞으니 내일 오라고 한다면, 그건 정말 가장 근본적인 의료 정신에 부합하는 것인가. 오히려 내 앞의 그 한 명을 위해, 오늘 돕고 내일 쉬는 것이 옳은 일 아닌가.


실재를 산다는 것은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논리가 실재가 되도록 만드는 일이다.

현실은 타당한 듯 보이나, 그 안에 실재가 없으면 그럴 듯한 위선과 자기변명이 채워진다. 판단으로 다름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러나 애초에 실재의 삶은 공감 받을 수 있는 삶이 아니다.

실재의 삶은 애초에 자기 몸이 가 있는 곳에서 부터 시작되는 삶이다. 사람들이 현실이라 말하는 건 오히려 다수결에 의거한 합리에 가깝다. 실재는 자기의 몸이 가 있는 자리에서 그러한 합리와는 달라지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애초에 다수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러니 다수결의 인정도 없으며, 공감 받을 수도 없다.

실재의 삶을 사는 이들은 다른 영역에 있는 사람들과 분리되어 시작하기도 한다.

노숙인의 똥오줌을 받으며 봉사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는 세월호 유족들의 아픔에 관심도 없으며 여전히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의료를 위해 자기희생을 하면서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 있어도, 그는 위안부 문제의 협상을 찬성하며, 이제 그만 끝내는 것이 모두에게 좋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실재를 산다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다. 반드시 감수해야 하는 일들이 생긴다. 다만 실재를 산다는 건 공감해 가는 것이다.

노숙인 문제든 장애인 문제든 결국엔 모든 것이 정치와 연결되어 있으며, 사회구조적인 소외를 직면하며, 또한 정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그 지난한 모든 과정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기만 하는 시간임을 경험할 것이다.

다만 그리하여 자신의 영역 넘어서의 사람들에게도 공감할 수 있게 되어 갈 뿐이다.


초라해짐이 자랑이며, 배신당함이 자랑이며, 구역질 날 만큼의 그 고통이 자랑이 될 것이다.

내게 남는 것은 없고 오히려 잃어 갈 것이나, 그 남은 자리에 공감하는 마음이 채워져 갈 것이다.

그러니 가진 것이 부끄러워지고, 내가 괜찮은 사람이란 것이 부끄러워 질 것이다.

내 자랑이 진짜 자랑이 아니라, 내 부끄러움만큼이 자랑이 될 것이다.


진짜 자랑한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그건 초라해진 사람, 배신당한 사람, 고통 속에 있는 사람, 그 옆에 함께 서주는 일이다.

자랑하는 일과 옆에 서주는 일은 따로 작용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늘 내가 할 일. 진짜 자랑.

오늘 내가 정말 부끄러운 것이 있었는가.

오늘 나는 초라해지고, 배신당하고,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한 걸음을 다가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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