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전승되는 이야기에서도 보이는 것 처럼 고대 시대에서는 갑자기 죽는 일이라거나 도깨비불 같은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어찌보면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신을 믿든지 신벌이 보편적인 세상이었고, 금기를 행하면 죽음이 있는 시대였다.
기독교의 신은 그 시대에 통용되는 모습, 곧 그 시대의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내려온다.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도 그 시대에 통용되는 고대 사회에서의 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벌이라고도 하는 데, 그러한 일을 행하는 신의 태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가 믿는 것이 어떤 신인지를 알 수 있다.
신의 경고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금기를 행하면 죽여버린다는 엄포로 해석할 수도 있고, 우리가 죽을 수 있는 일 앞에서 안타까워하며 그러지 않도록 부탁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곧 신에 대해 해석하는 시선은 다를 수 있는데, 사실 그건 다른 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똑같이 하나님이라고 부른다고해서 무조건 같은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 이름 붙였을 뿐 다른 존재를 보고 있을 확률이 높다.
(1) 기독교의 신은 그의 죽음을 모든 사람이 슬퍼할 일이라 한다. 시대의 법칙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건 혼란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 앞에 이스라엘의 슬픔을 얘기할 정도다.
내가 강아지때부터 키운 반려견이 찻길로 뛰어 들어가 차에 치어 죽으면, 그가 잘못했다고 할 것인가. 차가 잘못했다고 할 것인가. 빠른 속도로 충돌하면 죽는다는 법칙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법칙을 흔들어버리면 혼란이다. 슬픈 것은 그 법칙이 아닌 그의 죽음이다. 그저 전심으로 슬퍼한다. 하물며 죽는 우리를 두고 신은 어떤 마음이겠는가.
(2) 기독교의 신은 그 자신이 직접 내려와 사람에게 매달린다. 신은 아들을 잃은 아비 앞으로는 위에서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다가왔다. 신은 모세를 통해 위에서 전달할 때가 있고, 본인이 직접 다가올 때가 있다. 법은 전자에서, 신의 진짜 마음은 후자에서 표현되곤 한다.
모세는 잘못하면 죽는 게 신의 위엄이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나 신은 직접 내려와서 다른 아들들을 잃지 않도록 당부의 말을 전한다. 그 앞에서 아론은 무엇을 느꼈을까. 자신의 슬픔 앞에 그것을 바라봐 주는 사람이 없을 때, 직접 내려오기까지 함께 가슴 아파하는 신을 보며 어떤 마음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3) 어떤 행동을 금기라고 하는 지를 통해 어떤 행동이 가장 끔찍한 결과를 낳는지를 알 수 있다. 금기는 악한 일이 아니라 자기 소견대로 적당히 악과 선을 섞는 일이다.
신은 이미 악에 대해서는 사람이 그 죄를 반성할 수 있도록 신 자신이 죄를 책임질 방도를 마련해 놓았다. 가장 나쁜 결과는 악 자체가 아니라 적당히 선과 악을 섞는 행동에서 온다.
이 시대는 적당히 선과 악을 섞어서 사는 시대다. 그러면 성공하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다. 우리가 생각했던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무엇이었는지부터 다시 돌아본다. 그리고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란 게 세상을 어떤 꼴로 만들고 있는 지, 거기에 참여한 모든 개인 개인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를 돌아본다.
자기 소견대로 선과 악을 섞지 않으면 반드시 세상적인 실패를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성공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
오늘 나는 얼마나 변명하는지, 얼마나 변명하지 않는지를 지켜볼 것이다.
변명하지 않는 다면 그만큼 당면할 손해들을 마주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향하고 있는 것들을 돌아볼 것이다.
그렇게 내가 얻은 자유만큼만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갈 것이다.
아마 오늘도 힘들고 억울할 것이다.
딱 그만큼이 내가 판단할 수도 없는 선함으로 내 인생과 이 땅에서 이뤄질 것이다.
어떤 신을 믿든지 신벌이 보편적인 세상이었고, 금기를 행하면 죽음이 있는 시대였다.
기독교의 신은 그 시대에 통용되는 모습, 곧 그 시대의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내려온다.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도 그 시대에 통용되는 고대 사회에서의 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벌이라고도 하는 데, 그러한 일을 행하는 신의 태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가 믿는 것이 어떤 신인지를 알 수 있다.
신의 경고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금기를 행하면 죽여버린다는 엄포로 해석할 수도 있고, 우리가 죽을 수 있는 일 앞에서 안타까워하며 그러지 않도록 부탁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곧 신에 대해 해석하는 시선은 다를 수 있는데, 사실 그건 다른 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똑같이 하나님이라고 부른다고해서 무조건 같은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 이름 붙였을 뿐 다른 존재를 보고 있을 확률이 높다.
(1) 기독교의 신은 그의 죽음을 모든 사람이 슬퍼할 일이라 한다. 시대의 법칙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건 혼란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 앞에 이스라엘의 슬픔을 얘기할 정도다.
내가 강아지때부터 키운 반려견이 찻길로 뛰어 들어가 차에 치어 죽으면, 그가 잘못했다고 할 것인가. 차가 잘못했다고 할 것인가. 빠른 속도로 충돌하면 죽는다는 법칙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법칙을 흔들어버리면 혼란이다. 슬픈 것은 그 법칙이 아닌 그의 죽음이다. 그저 전심으로 슬퍼한다. 하물며 죽는 우리를 두고 신은 어떤 마음이겠는가.
(2) 기독교의 신은 그 자신이 직접 내려와 사람에게 매달린다. 신은 아들을 잃은 아비 앞으로는 위에서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다가왔다. 신은 모세를 통해 위에서 전달할 때가 있고, 본인이 직접 다가올 때가 있다. 법은 전자에서, 신의 진짜 마음은 후자에서 표현되곤 한다.
모세는 잘못하면 죽는 게 신의 위엄이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나 신은 직접 내려와서 다른 아들들을 잃지 않도록 당부의 말을 전한다. 그 앞에서 아론은 무엇을 느꼈을까. 자신의 슬픔 앞에 그것을 바라봐 주는 사람이 없을 때, 직접 내려오기까지 함께 가슴 아파하는 신을 보며 어떤 마음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3) 어떤 행동을 금기라고 하는 지를 통해 어떤 행동이 가장 끔찍한 결과를 낳는지를 알 수 있다. 금기는 악한 일이 아니라 자기 소견대로 적당히 악과 선을 섞는 일이다.
신은 이미 악에 대해서는 사람이 그 죄를 반성할 수 있도록 신 자신이 죄를 책임질 방도를 마련해 놓았다. 가장 나쁜 결과는 악 자체가 아니라 적당히 선과 악을 섞는 행동에서 온다.
이 시대는 적당히 선과 악을 섞어서 사는 시대다. 그러면 성공하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다. 우리가 생각했던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무엇이었는지부터 다시 돌아본다. 그리고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란 게 세상을 어떤 꼴로 만들고 있는 지, 거기에 참여한 모든 개인 개인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를 돌아본다.
자기 소견대로 선과 악을 섞지 않으면 반드시 세상적인 실패를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성공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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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얼마나 변명하는지, 얼마나 변명하지 않는지를 지켜볼 것이다.
변명하지 않는 다면 그만큼 당면할 손해들을 마주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향하고 있는 것들을 돌아볼 것이다.
그렇게 내가 얻은 자유만큼만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갈 것이다.
아마 오늘도 힘들고 억울할 것이다.
딱 그만큼이 내가 판단할 수도 없는 선함으로 내 인생과 이 땅에서 이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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