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체로서의 예수는 가해자이기도 하다.
예수는 여성혐오, 장애인혐오, 외국인혐오가 기본값인 사회에서 남성, 비장애인,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그가 학습한 가해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성서에서는 외국인 여성에게 발화한 외국인혐오에 해당하는 증오언설이 기록되어 있다(물론 그것은 후대의 첨가일 수도 있겠다).
또한 원하지 않더라도 기득권의 몸을 입었기에 그 자체로 얻게되는 가해의 요소도 있다. 폭행당하고 착취당하는 여성, 외국인 등 소수자에게 그의 몸 자체가 위협이 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단지 개체를 넘어 연결되어 있는 구조적 존재다.
그렇기에 신으로서의 예수는 어떤 가해도 없는 개인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고 몸은 그럴 수 없다.
오히려 가해자성을 가진 한 개체가 타자와 만나고 관계 맺으면서 가해의 구조를 극복해가는 그 만남과 관계가 신으로서의 예수다.
신으로서의 예수는 단지 어떤 개체가 아니라 만남과 관계의 현상이다. 신은 단지 개체에 있지 않고, 개체에 오지 않고, 만남과 관계로 존재한다.
만남과 관계 안에는 언제나 당사자 개체만이 아니라 우주적인 하나의 연결성이 언제나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에게 언제나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인간의 몸이 만남과 관계 속에서 어떤 하나된 우주적 가치로 회복되는 현상이 신으로서의 예수다.
결국 그 가치는 이데아나 진리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피와 살에 붙어 있다.
다만 가축으로 억압된 동물들의 자리에서 여물통에 출산한 가난한 십 대 미혼모의 아이와 같이다만 친부를 모른채 임신한 가난한 십 대 산모가 가축으로 억압된 동물들의 자리에서 여물통에 출산한 아이와 같이, 가치로운 곳에서 그 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가 억눌려 도살되고 있는 곳에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 예수다.
몸의 가해자성을 부정하지 않은 채, 개체를 넘어선 관계의 주체성을 보고, 신성화되는 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고기라 하는 곳에서 고기와 한 몸이 되는 관계, 거기에 예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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