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해가 하루 동안 머문 사건을 기록한다.
목사들은 이것을 능력과 믿음으로 처리한다.
그것이 천동설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진 사회에서 만들어진 설화라는 설명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흥부전을 읽는 다는 것은 제비가 요술박씨를 물어온다고 믿는 일은 아니다. 그 설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는 것이다.
오히려 요술박씨가 존재해야 메시지가 참이라는 설명은 메시지 자체를 사이비로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해가 하루 동안 머물지 않았다고 하여 그것이 신을 부정하는 일이 되지는 않는다. 메시지가 흐릿해 질 일도 없다.
아담의 갈비뼈에서 하와가 나왔다고 믿어야, 예수의 단성수태를 믿어야,실제로 구멍 뚫린 몸이 부활했다고 믿어야 기독교인인가?
그것이 존재해야 복음이 참이라는 설명이 정말 복음 자체를 위한 일이지는 않다. 요술 같은 일이 없었다고 신을 믿을 수 없으면, 그는 신을 믿은 것이라기 보다는 요술을 믿은 것이었을 수 있다.
요술박씨가 없다고 흥부전이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만들어진 이야기를 통해, 그것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에 힘을 얻는 일은 가짜가 아니다.
다만 흥부전에서 읽어야 하는 건 요술박씨가 아닌 선행이듯, 마찬가지로 성서의 설화에서 읽어야 하는 건 요술 같은 일들이 아닌 참된 실행의 생이다. 그 죽음과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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